집 안의 사물은 언제나 경청해준다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새로움에 살다, 빌리브

집 안의 사물은 언제나 경청해준다
작가 김승 에세이

Text | 김승
Photos | NKcontents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을 보면서 나도 사물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을 향해 말을 하기보다 사물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방 안에서 하루 동안 힘들었던 일에 대해 혼자 구시렁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사물이 침묵한다는 것에 안도한다.

영화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663은 이별의 아픔을 겪은 뒤에 집에 있는 사물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왕페이가 연기한 페이는 663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일하는데, 663의 전 여자 친구가 맡기고 간 열쇠로 663의 집에 들어가 사물들을 바꿔놓는다. 떠난 여자 친구를 비롯해 현실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663은 집 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663은 비누에게 전에는 뚱뚱했는데 너무 야위었다면서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젖은 수건에게 계속 울지만 말고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등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사물에게 한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을 보면서 나도 사물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을 향해 말을 하기보다 사물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방 안에서 하루 동안 힘들었던 일에 대해 혼자 구시렁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사물이 침묵한다는 것에 안도한다. 내가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늘 지켜보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의 적나라한 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니까.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
난 그 물건들을 위로한 후 잠이 든다.”

나의 혼잣말을 가장 많이 들은 사물은 옷장이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부터 있었으니 15년 넘게 함께해왔다. 옷장은 나의 옷 취향을 가장 잘 아는 존재다. 밖에서 만나는 이들은 내가 입는 옷이 어떤 스타일인지 파악할 수 있지만, 옷장은 내가 어떤 옷을 즐겨 입고, 사놓고도 잘 안 입는지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다. 옷장 문 안쪽에는 거울이 달려 있는데, 거울 앞에서 옷을 입어보고 “이거 별로인가?”라는 식의 혼잣말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다.

 

15년 넘게 쓴 옷장이 최근 몇 달 사이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 결국 버리기로 했다. 사물을 버리는 순간이 되면, 사물이 말을 듣는 것 같다고 의미 부여했던 순간이 후회된다. 일방적으로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한 사물은, 말 한마디 못 하고 일방적으로 버려진다.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인 옷장을 밖에 내놓는다. 방 안에 옷장이 사라진 바닥 위로 옷장이 남긴 자국이 선명하다. 보일러 때문에 바닥이 따뜻한데 옷장이 남긴 온기 때문에 따뜻한 것만 같다.

김승이 여행 때 묵은 숙소에서 찍은 사진 / 김승 제공

옷장을 버리는 김에 옷장 안에 있던 옷도 정리한다. 중요한 때만 입으려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색이 바랜 남방도 있고, 한때는 약속이 있을 때만 입었던 아끼는 옷이었는데 이제는 집에서 입는 게 당연해진 티셔츠도 있다. 정작 가장 좋아한다고 아낀 옷은 썩어가고 있고, 편하게 막 입는 옷을 입고 보낸 시간이 더 길다. 옷이 썩어 버리는 건 옷장의 온도나 습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미련함 때문이다.

 

평생 부모님과 함께 살다 최근 독립을 결심했다. 혼잣말할 때를 비롯해 가족 눈치를 보는 순간이 늘어난 것도 독립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다. 살펴본 여러 집에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간 흔적이 묻어나 있다. 빌라 거실 벽에는 아이가 자랄 때마다 키를 표시한 볼펜 자국이 남아 있고, 오피스텔에 설치된 붙박이장 손잡이는 손 모양을 따라 칠이 살짝 벗겨져 있다.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보면, 그 흔적이 남기까지 했을 말이 떠오른다. ‘키가 벌써 이만큼 자랐네.’ ‘오늘은 뭐 입고 나갈까?’ 사람의 말이 고체였다면 우리가 사는 집의 평수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어야 했다.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보면,
그 흔적이 남기까지 했을 말이 떠오른다.

입주를 상상하며 텅 빈집을 바라본다. 분명 빈집인데 온기가 돈다고 느껴지는 건 앞으로 채워나갈 집의 온기를 기대해서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살아온 이들의 온기가 남아서일까. 집이 지어진 이후 살았던 사람들의 수많은 말이 벽과 바닥 사이사이로 스며들었을 거다. 집에서 살아가는 데에, 채광이나 수압처럼 따로 체크하지 않지만, 가구부터 인형까지 집을 구성하는 사물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너라도 듣겠지’라는 생각으로 혼잣말을 하고, 힘들 때 물리적으로 기댈 수 있다는 건 생활의 큰 버팀목이 된다.

영화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의 러닝타임은 끝이 났지만 내 삶에는 아직도 긴 시간이 남았다. 663은 사물을 위로해주고 잠든다고 하지만, 나는 사물에게 위로받고 잠이 든다. 속마음을 입 밖으로 뱉어 말하고, 사물이라도 내 말을 들어준다고 의미 부여를 하는 건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독립을 준비하며 집을 채울 사물들을 고른다. 새로 삶을 시작하게 될 집에서 나는 사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을까.

김승 |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저자. 커머스 기업 마케터이자 중앙일보사 <폴인>과 문화 웹진 <인디포스트> 객원 에디터로 각각 산업과 영화에 대한 글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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