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아파트 글자’를 수집하다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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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아파트 글자’를 수집하다
강예린, 윤민구, 전가경, 정재완 <아파트 글자>

Text | Bora Kang
Photos | 사월의눈(Aprilsnow)

시작은 대구에 자리한 5층짜리 ‘경북아파트’였다. 그 단단하고 짜임새 있는 레터링에 깊은 인상을 받은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은 북 디자이너 정재완에게 아직 남아 있는 ‘아파트 글자’ 수집을 제안했다. <아파트 글자>(사월의눈)는 두 사람이 틈틈이 수집해온 아파트 글자를 선보이는 첫 아파트 글자 컬렉션이다.

‘사월의눈’은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과 북 디자이너 정재완이 운영하는 대구의 작은 출판사다. 두 사람은 2009년 대구 경북아파트 레터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아파트 글자를 틈틈이 수집했다. 길을 걷다 유별난 아파트 글자가 보이면 휴대폰이나 카메라로 글자를 담아내는 식이었다. 오래된 저층 아파트가 산발적으로 자리한 대구에서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글자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이후 전주, 부산, 서울 등의 아파트 글자를 추가로 모으면서 제법 방대한 컬렉션이 완성됐다. <아파트 글자>는 그중 일부를 추린 결과물로, 책에는 아파트 글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세 편의 글을 함께 수록했다.

“어느덧 아파트 글자 수집은 글자의 조형성뿐만 아니라 아파트 글자의 ‘사회사'를 읽어나가는 텍스트가 되었다. 아파트 글자는 지역 건설사가 나름의 책략으로 꺼내 든 소소한 브랜딩 도구이기도 했으며, 오늘과 다른 아파트 네이밍의 흔적을 보는 장소이자 익명의 ‘타이포그래퍼’ 혹은 ‘레터러letterer’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전가경은 온라인에서 읽은 흥미로운 기사를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전국 1만 6342개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준공 시기별 아파트명의 평균 글자 수를 조사한 결과 1979년 이전에 지은 아파트는 평균 3자였으나 1980년대 3.5자, 1990년대 4.2자 등으로 글자 수가 점차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전국에서 가장 긴 아파트 이름은 19자.” <경향신문> 2014년 12월 18일 자). 요컨대 국내 아파트 이름이 날이 갈수록 길어진다는 것이다. 그에게 이 기사는 음미할 만한 현상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잠실주공아파트와 둔촌주공아파트, 고덕동 삼익아파트, 신동아아파트, 현대아파트 등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아파트 키드로, 때마침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아파트 글자를 모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논밭이 아파트 풍경 바로 옆에 펼쳐졌던 고덕동 삼익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것은 일종의 좌석 업그레이드였다. 주공에서 삼익으로의 승차는 공기업에서 민간 건설사 중심으로 확장된 주택 시장의 전환이자 아파트 시장에서 브랜드라는 고유명사의 가치가 곧 프리미엄이 되는 시대의 전초 격이었다.”

 

정부 주도로 지은 1960년대 초기 아파트의 경우 ‘종암아파트’, ‘마포아파트’처럼 지역명을 차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1970년대에 등장한 민간 건설사 아파트는 ‘압구정현대아파트’, ‘삼성마포아파트’ 등 지역과 건설사명을 함께 넣어 브랜드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해당 주거 공간이 추구하는 이상적 모델이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그가 전주에서 본 ‘유토피아아파트’, 대구 신천 변에서 마주한 ‘신생활낙원’ 등이 그렇다. 전가경은 ‘캐슬’, ‘힐’, ‘팰리스’ 등 기표적 층위만 변화한 채 소비자의 환심을 사는 길고 긴 오늘의 브랜드를 이야기하며 “1960~1980년대의 아파트 이름은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는 모더니즘 정신에 차라리 가깝다”고 말한다.

번지수라는 객관적 정보로 인식되는 유럽의 주거 공간과 달리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이름과 심벌로 주거 공간이 표상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전가경은 자신이 겪은 유럽의 주택을 떠올리며, 번지수라는 객관적 정보로 인식되는 유럽의 주거 공간과 달리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이름과 심벌로 주거 공간이 표상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대아파트의 보수적인 예서체, 주공아파트의 집 모양 심벌마크, 삼익아파트의 유별난 문장 디자인과 신동아아파트의 데코마스적 기업 CI 디자인 등에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부과한 욕망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나아가 아파트 글자라는 조형적 틀을 만들어낸 인물의 익명성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국내에서 아파트 글자 디자인과 관련해 디자이너의 이름이 거론된 사례는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을 아트 디렉팅한 디자이너 이상철의 삼호아파트 심벌마크와 레터링이 유일하다.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이지만 아파트 글자만큼은 철저하게 익명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파트 글자>는 아파트 외벽 도장공 유영욱과의 인터뷰를 통해 과거 아파트 글자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글꼴 디자이너 윤민구가 진행한 이 인터뷰에서 우리는 40여 년간 글자를 그려온 1세대 외벽 도장공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거리의 간판과 더불어 아파트 외벽에 그려진 글자를 관찰하는 것은 과거의 타이포그래피를 현재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작명과 표현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 1980년대에 그린 글자 레터링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잡지 제호나 광고 지면에 무수히 많던 글자 레터링은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하지만 거대한 아파트 벽면 글자 레터링은 아직 숨지 않았거나 ‘못’했다. 언젠가 그 벽이 허물어질 때, 글자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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