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갤러리, 작업실의 삼위일체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새로움에 살다, 빌리브

집, 갤러리, 작업실의 삼위일체
미술 작가 홍인숙

Text | Bora Kang
Photography | Siyoung Song

그의 둥지는 예사 집이 아니다. 작품이 전시된 1층은 집이라기보다 갤러리에 가깝고, 지하에는 판화 작업에 쓰는 육중한 프레스기가 자리 하고 있다. 감나무 아래에 구절초가 만발한 마당에서는 계절마다 자연을 주제로 한 판화 교실이 열린다. 그는 이곳에서 이따금 함께이고, 자주 혼자다.

수원화성이 있는 화성 지구에 살고 있어요. 이곳에 사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니까요. 화성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작가로서의 정서가 다 이곳에서 비롯된 셈이거든요. 제 그림은 모두 유년 시절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화성은 제가 어릴 때는 거의 시골이나 다름없었어요. 아마 압구정동에 살았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나왔을 거예요.(웃음)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강사로 오래 일했어요. 고향으로 돌아와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전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색해요. 제게 화성은 ‘당연히 와야 할 곳’이지 ‘돌아온 곳’이 아니거든요. 물론 서울에서 살면 생활이야 더 편하겠죠. 그럼에도 굳이 화성에 사는 이유는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 여기 있어서예요. 아버지가 정류장 앞에서 학원 가방 들어주던 기억 같은 것요.

 

마당에서 성곽 길이 훤히 보이네요. 문화재 옆에 살면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좋은 점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간을 초월하는 느낌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고도 제한 때문에 주변 건물이 다 야트막해서 하늘이 많이 보인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여백이 넓으니 그만큼 사람들의 삶이 잘 보이고 사색할 여유가 생겨요. 사색의 힘이 이 동네의 힘인 것 같아요. 주민들이랑 대화하다 보면 다들 시인이 따로 없어요.

“제게 화성은 ‘당연히 와야 할 곳’이지 ‘돌아온 곳’이 아니거든요. 물론 서울에서 살면 생활이야 더 편하겠죠. 그럼에도 굳이 화성에 사는 이유는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 여기 있어서예요.”

집을 1년여에 걸쳐 손수 고쳤다고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너무 눈에 띄는 집이 되지 않았으면 했어요. 안 그래도 관광지라 부동산 문의가 많은 곳인데 제가 집을 너무 예쁘게 꾸미면 골목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뀔 것 같았어요. 저 하나 때문에 동네 고유의 분위기를 지켜온 어르신들의 삶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뭘 하기가 조심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외관은 그대로 두고 간판도 일부러 안 달았어요.

 

1층 공간을 갤러리로 쓰고 있어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나요?

제가 초대하고 싶은 분들을 그때그때 초대하는데 모임 성격에 따라 그림을 바꿔 걸어요. 얼마 전에는 미얀마 이주민 청년들이 와서, 미얀마에 다녀온 지인이 준 바간 Bagan 사진을 걸었어요. 판화 교실을 열 때는 호크니, 마그리트 등 제가 그동안 조금씩 사 모은 현대 판화 작품을 걸고요. 컬렉터나 관계자분들이 오실 때는 주로 제 그림을 걸어요. 오늘은 <빌리브>에서 오신다고 해서 특별히 문자 그림 ‘집’을 골라봤어요.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프라이빗 갤러리라고 보면 될까요?

그렇게 거창한 개념은 아니고요, 우리 눈에 잘 안 보이는 분들, 시각 예술 분야에서 소외된 분들을 제 서식지에 초대한다고 보면 맞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작가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거든요. 첫째는 먹고사느라 바빠서 자신이 얼마나 기쁜지 슬픈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 감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둘째는 그런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해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에게 집은 생산을 위한 공간이자 나눔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를 위한 공간이자 타인을 위한 공간이지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당에서 ‘자연 속의 이동 판화 교실’을 진행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수업인가요?

수원에서 저와 함께 성장한 동창, 선후배들과 함께 ‘판화와 생활이 접목된 하루를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성곽 길을 산책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판화로 표현하는 수업입니다. 몸이 불편한 분, 혹은 평소 시각 문화를 체험하기 어려운 분을 대상으로 교육적인 면보다는 판화의 복제성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을 널리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해서요. 저처럼 매체에 작품을 발표하는 운 좋은 작가들 말고도, 일상에서 빛나는 생활 예술가가 주변에 정말 많거든요.

 

사람들에게 미래에 살고 싶은 집을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이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에요. 로망을 실현한 분으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면요?

제 동생이 그러더라고요, 언니 때문에 단독주택에 대한 로망이 다 깨졌다고.(웃음) 집을 처음 고치기 시작했을 때가 겨울이었는데 수도관이고 뭐고 다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주택 전체가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집이 저에게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랄까요. 모든 집이 그렇겠지만 특히 단독주택은 사람이랑 정말 비슷한 것 같아요. 애정을 쏟지 않으면 반드시 탈이 나요.

“집을 처음 고치기 시작했을 때가 겨울이었는데 수도관이고 뭐고 다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주택 전체가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집이 저에게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랄까요.”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그림이 된 말들>에서 ‘가족’, ‘집’, ‘밥’, ‘사랑’, ‘뿅’, ‘썅’ 등의 단어를 한지 위에 그리듯이 쓴 문자 그림을 전시했어요. 전 특히 ‘집’이라는 글자가 울림이 크더라고요. 본인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때 전시한 건 올해 그린 작품이고, 지금 여기 걸린 ‘집’은 초창기 작업이에요. 젊었을 때는 미리 구상하고 그리기보다는 직관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서 스스로도 왜 집을 그리는지 잘 몰랐어요. 근데 40대 중반에 접어드니 새로운 깨달음이 오더군요. ‘집이 곧 행복이구나, 그때 나는 행복을 그리고 싶었구나’ 하고요. 모든 사람에게 집은 행복이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그림에 글자뿐 아니라 연못, 기와집, 담장, 장미, 수양버들 같은 작은 도상이 자주 등장해요. 그래서인지 가정의 다복을 기원하는 민화가 연상되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제 그림에서 민화의 요소를 발견하는 분이 많아요. 저로서는 어렸을 때 보고 느낀 걸 그대로 그린 것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생활 속에 이미 민화의 요소가 녹아 있었던 거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는 항상 토템이 있었어요. 꼭 시골이 아니더라도 저와 같은 1970년대생들은 대부분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했을 거예요. 안방의 자개 장롱이며 밥상, 하다못해 간장 종지까지 어디 하나 기복奇福이 빠진 도상이 없었으니까요.

 

먹지 위에 밑그림을 베낀 후 색깔별로 판을 잘라 그 색판 수만큼 프레스기를 돌리는 지판화 기법을 고수하고 있어요. 드로잉과 채색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두고 이처럼 돌아가는 수고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특히 요즘 같은 기술 복제 시대에.

재료나 기법은 작가의 가치관과 태도를 말해준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판화는 저에게 작가로서의 예민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매체죠. 특히 종이 판화는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거든요. 개인적으로 예민하고 섬세한 작업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또 하나는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다는 거. 그게 판화의 가장 큰 매력이죠.

만약 집에 단 한 점의 문자 그림을 건다면 어떤 작업을 선택하겠어요?

‘싸랑’. 모든 사랑은 지나간 다음에 알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 감정이 바로 ‘싸랑’이 아닐까 해요.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랑’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요. ‘싸랑’이야말로 우리가 지구에 떨어진 이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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