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처마 아래에서 프랑스 센강을 바라보며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새로움에 살다, 빌리브

한옥 처마 아래에서 프랑스 센강을 바라보며
아티스트 이융세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세상의 빛’이란 의미의 한국 이름 융세. ‘자유로운 사람’이란 의미의 프랑스 이름 프랑수아. 프랑스에서 자란 한국인 아티스트인 그는 아버지 고암 이응노 화백의 흔적이 가득한 프랑스 보쉬르센Vaux Sur-Seine 지역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는 아버지를 기념하고 한국을 알리자는 뜻으로 대목장 신영훈을 초청해 한옥 고암서방을 지었다.

1만㎡ 땅 위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 한국과 유럽 풍경이 교차한다. 1992년 한옥 건축 대가 신영훈이 설계한 한옥 고암서방, 2014년 스위스 출신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Jean Michel Wilmote가 디자인한 아틀리에와 어머니 박인경 여사의 자택, 젊은 화가들이 머무는 레지던스, 한때 인상파 화가 에밀리오 보기오Emilio Boggio가 거주했던 그의 자택이 자리 잡고 있다. 동서양의 만남이 이뤄지는 테두리에서 아티스트 이융세는 그의 이름처럼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다.

 

프랑스 보쉬르센에서 한국 전통 기와집을 발견하게 될 줄 몰랐어요. 한옥 창살문을 활짝 여니 저 너머에 호젓한 분위기의 센강이 보이네요.

프랑스에 살면서 늘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아버지를 오마주하며 지은, 유럽 내 최초이자 유일한 한옥이죠. 아버지 호를 따 고암서방이라 이름 지었어요. 어머니가 대목장 신영훈 선생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한국에서 완성한 후 다시 분해해 이곳으로 옮겨왔죠. 캐나다에서 구해 온 큰 대들목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에서 공수했어요. 122㎡(약 37평) 규모로 중앙 마루, 안방, 작은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실제 거주하지 않고 한국을 알리고 상징하는 공간으로 사용해요.

“집 안에서 점처럼 보이는 먼 곳을 바라보는 즐거움, 서양에는 없는 것이죠. 반대로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옥을 바라보는, 먼 곳에서 한옥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어요. 이런 걸 한국말로 ‘운치 있다’고 하나요?”

대들보에 “1992 6 28 1시 고암서방 상량하였다. 무궁무진이라 적혀 있네요.

신영훈 대목장님 서체예요. 한계 없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무궁무진’이란 글자를 새겼다고 해요. 집은 풍수지리에 따라 짓고 1992년 완공식 때 무당이 굿을 하기도 했죠.

 

이렇게 한옥 처마 아래 서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사실 프랑스에서 자란 저에게 한옥은 무척 생소한 공간이에요. 그러나 낯설지만 와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거대한 대들보를 중심으로 균형 있게 짜인 나무 구조물을 볼 때마다 어느 것 하나 과하거나 위엄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고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젖는 느낌이에요.

한옥이 생소한 프랑스인들도 이곳에서 많은 질문을 할 것 같네요.

맞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서양의 자연 풍경 속에 어떻게 한옥이 이토록 멋지게 들어앉았을까 하고 감탄하죠. 배산임수 터 주변의 산과 나무 높이와 넓이를 모두 계산한 결과로 얻은 균형적인 비례로 지은 한옥이라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울림이 있어요. 무엇보다 외국인들은 한옥에서 창살문을 열고 바라보는 굽이치는 센강의 풍경이 인상적인 것 같아요. 집 안에서 점처럼 보이는 먼 곳을 바라보는 즐거움, 서양에는 없는 것이죠. 반대로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옥을 바라보는, 먼 곳에서 한옥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어요. 이런 걸 한국말로 ‘운치 있다’고 하나요? 다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하죠. 패션쇼나 숙박 관련 문의도 많았어요. 모두 거절했지만요.

고암서방 맞은편에는 시공간을 건너뛴 듯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디자인한 미니멀한 아틀리에 건물이 반전처럼 우뚝 서 있어요. 그는 가나아트센터, 서울 옥션하우스, 인사아트센터, 인천국제공항 등을 설계한 유명 건축가죠.

장 미셸 빌모트가 이 아틀리에 건물을 지을 때 사뿐히 고개를 든 한옥 지붕에서 영향을 받아 간결하면서도 살짝 기울어진 지붕을 만들었죠. 다른 환경, 방식, 해석을 지닌 건물이지만 한옥과 짝을 이루는 연결 고리가 있어요. 원래 이 건물은 아버지가 1964년 파리 활동을 하던 당시 설립한 동양미술학교의 명맥을 잇는 고암 아카데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어요. 고암 아카데미는 유럽인에게 동양화를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고, 전 세계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죠. 198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와 제가 아버지 역할을 이어받아 이곳에서 고암 아카데미를 운영하는데, 장 미셸 빌모트는 그 목적을 잘 이해했어요. 대형 작품을 사방으로 이동하기 쉽게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로 볼륨감이 큰 공간을 만들었죠. 또 작가를 위해 통유리로 들어온 밝은 빛이 하루 종일 머물도록 했어요.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일을 보류한 채 저 혼자 이 넓은 공간을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있어요. 내년에 다시 프로그램을 시작할 예정이에요.

 

프랑스에서 자란 한국인으로, 위대한 예술가의 자녀로, 이융세란 사람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했을 것 같아요.

저에게 한국인 이융세와 프랑스인 프랑수아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혼란이나 대립이 아닌 융합과 조화의 관계로 제 안에 머물죠. 융세는 ‘세상의 빛’이란 뜻이고 프랑수아는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해요. 두 이름의 뜻을 하나로 합치면 ‘자유로운 세상’이죠. 한국인이자 프랑스인이라는 이중 정체성은 저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어요. 동서양의 각기 다른 기법을 자유롭게 익힐 수 있게 해주고, 작업 또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었죠. 제 고향은 한국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제 작업은 한국적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티스트 작업 말고 푹 빠진 취미가 있나요?

경주용 자전거요. 매년 해발 2000m 몽벤투Mont Ventoux와 모리엔Maurienne 골짜기의 해발 2764m 콜 드 리제랑Col de L’Iseran 정상을 자전거로 오르죠. 가장 아끼는 물건을 꼽으라 하면 제 경주용 자전거를 선택할 거예요.

 

작품을 위해 장거리 알프스 산행을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자연에서 느끼는 원시적 힘에서 영감을 얻는 건가요?

아니요. 전 영감을 수동적으로 얻기보다 능동적으로 찾는 편이에요. 자신에게 파고드는 명상으로 발견하죠. 명상은 길에 핀 야생화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위대한 산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발단이 되기도 해요. 오직 한 발 내딛는 그 자리.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먼지처럼 사라지죠. 명상하듯 걸음에 빠져들죠. 마음에 집중하다 보면 마치 내 몸이 나침반이 된 것처럼 잃었던 방향을 찾게 돼요.

 

한지가 작업 주제가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나요?

그렇죠. 아버지에게 배운 탁본 기법(금속·기와·돌·나무 등에 새겨진 그림이나 문자를 복사하는 기법)도 작품에 자주 활용해요. 그러나 누군가 제 그림이 한국적인 것인지 묻는다면 고개를 젓고 싶어요. 1990년대부터 과슈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는데, 이 점은 분명 서양미술의 표현법에 닿아 있죠. 제 작품에는 아트 테라피적 요소가 있어요. 고요와 평정 속에 분노와 격정의 감정이 계곡처럼 모이고 흐르죠.

아티스트로 살아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작업하는 바로 그 순간.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자체. 이것으로 충분해요.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요. 유명해지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그저 걷는 것처럼 순간순간 작은 일에 기쁨을 느껴요.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는 것도, 한옥 처마에 앉아 센강을 바라보는 것도 모두 즐겁죠. 즐거움을 목적으로 두지 않으면 사소한 것도 즐거운 법이에요.

 

베네수엘라의 인상파 화가 에밀리오 보기오가 거주하던 장소에서 살고 있는데, 3층 자택 공간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약 500㎡ 규모의 3층 건물로 역사성이 깊은 집이죠. 야생적 돌벽도 아름답고요. 에밀리오 보기오가 대형 캔버스를 건물 밖으로 꺼내기 위해 세로로 긴 홈을 파놓았는데, 그 흔적을 없애지 않고 유리 커버를 씌운 채 남겨두었어요. 건물을 가로지르는 긴 세로 홈에 빛이 가득 차면 마치 신성한 장소로 가 닿을 것 같은 틈처럼 보여요. 그 빛은 향기처럼 예술적 본능을 건드리죠. 아침 일찍 일어나 아틀리에로 향하게 만드는 방향등이 됩니다. 내부에는 작은 응접실이 있는데, 퐁피두 센터 관장 베르나르 블리스텐, 학예실장 크리스티앙 브리앙 등 수많은 갤러리스트와 아티스트가 다녀갔어요. 자랑할 만한 인테리어 요소도, 멋진 가구도 없지만 우물 찾은 기쁨을 알게 해준 인연이 가득한 공간이라 저에겐 매우 특별해요.

그럼에도 만약 다른 공간에 살아야 한다면 어느 장소를 택할 건가요?

미래의 통일된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아니면 산과 들로 가득 뒤덮인 스위스. 스위스 전통 건축법으로 만든 아틀리에에서 생활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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