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사소한 기억을 발굴하는 장소 애호가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새로움에 살다, 빌리브

장소의 사소한 기억을 발굴하는 장소 애호가
공간 기획자 박성진

Text | KaKyung Baek
Photos | Hoon Shin

공간 기획과 출판 기획을 하는 사이트앤페이지의 박성진 디렉터. 스페인 유학 시절을 거쳐 건축 전문 잡지 <공간Space> 편집장으로도 일했던 그가 어린이집, 철물점, 사무실, 휴게소 등에 관해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소하다 못해 가끔은 진부하기까지 한 일상의 장소에서 그는 놓쳐선 안 될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일상이 쌓여 인생이 되듯이 그는 36곳의 장소에 대한 ‘사소함’을 <모든 장소의 기억>이라는 책에 담았다.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나요?
코로나 이후로 집이나 사무실에서 온전히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아요. 외부에서 일하기보다는 집과 사무실을 오가면서 생긴 루틴이 있어요. 제가 출판 기획도 하기 때문에 책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거든요.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집에 돌아가서 하루를 마무리할 때 잠깐씩 책을 보는 거로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해요. 출근하면 커피 한 잔 들고 제 자리 뒤에 서서 10~15분간 책을 보고 일을 시작해요. 최근에 생긴 중요한 루틴 중 하나예요.

사이트앤페이지Site & Page에 대한 소개 부탁드려요.
제가 하는 일이 회사 이름에 정직하게 나타나 있어요. 사이트와 페이지, 다시 말해 공간 기획과 출판 기획 두 가지 일을 하는 거죠. 공간 기획이라고 하면 건물을 설계하거나 디자인하기 전에 ‘그 공간이나 장소에 어떤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담을지’, ‘디자인이 지향해야 할 철학이나 콘셉트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를 통칭해요. 페이지는 책을 말하는 거죠. 제가 직접 책을 쓰기도 하고 편집자로서 기획하기도 하고요. 공간이나 장소를 기획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옮겨와야 하는 순간이 생겨요. 또 건축 사업을 하다 보면 사업 과정을 기록해 브랜드 북이나 디자인 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고요. 공간 기획과 출판 기획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소처럼 연동되어 있어요.

공간을 기록으로 옮기는 것에서 어떤 가치를 느끼나요?
제가 일할 때 신념처럼 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기록, 기획, 비평이에요. 보통 기록이라 하면 과거를 박제해 보관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아요. 기록은 창조적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20년 전엔 이 장소가 어땠는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등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을 훑어보면서 지금 이 공간에 적합한 가능성과 쓰임새를 고민해요.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예전의 지도, 항공사진 등을 보는 걸 꽤 즐겨요. 지난해 익산시의 공영 주차장을 문화 주차장으로 리뉴얼하는 사업의 총감독을 맡은 적 있어요. 그 시점에서 50년 전의 익산시 지도를 봤죠. 지금 우리가 아는 구조와 다르더라고요. 그 시간의 흐름에서 생긴 중요한 사건이 이리역 폭발 사고였어요. 그 시점을 기준으로 전후를 살펴보니 도시 구조와 위계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박성진의 삼상리 주택 / ©이원석

3년 전 아파트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원주택을 지었어요. 그 장소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사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에요. 저희가 지금 사는 장흥면은 청주 한씨 문중이 터를 잡고 사는 마을이더라고요. 근데 아내가 청주 한씨였어요. 어떻게 보면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듯 아파트 생활을 접고 우연히 이주한 곳이 청주 한씨 문중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던 거죠. 마을 이장님과 어르신들에게 집 바로 옆에 있는 약수터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 동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고 있어요. 어제 아침에 운동을 나갔는데, 저희 동네에서 30년 전 처음으로 펜션을 시작한 어르신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며 함께 걸었죠.

한국 YMCA 건물을 리모델링한 페이지명동 / ©노경

오래되고 낡은 공간을 발굴하고 중개하는 초현실부동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13년 전쯤 스페인으로 유학 갔을 때 세비야의 구도심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 한가운데 “오래된 집만 취급합니다”라고 써놓은 부동산 사무실이 있는 거예요. 되게 신기했죠. 스페인에서 건축 문화유산 복원과 경영을 공부하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이탈리아, 스페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오래된 고성과 고택을 풍부한 건축 자산으로 취급하는 부동산이 있는 이유였죠.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나라 풍토에 맞게 이런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죠. 본격적으로 초현실부동산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건 2년 전 사이건축 이진오 건축가와 명동에 있는 한국YMCA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였어요. 그 건물은 YMCA 연합회로서 역사적 가치를 계승해 지금은 사회 혁신 기업 ‘더함’을 위한 공간으로 새롭게 재탄생했어요. 이처럼 근대건축 자산을 그 장소에 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감성과 목적에 맞게 덧입히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이런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중개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한 거죠. 지금은 마음 맞는 공인중개사, 건축가, 디자이너, 도시계획가, 에디터 등 7명의 구성원과 초현실부동산을 일궈나가고 있어요.

“(부동산은) 돈, 평수 등 숫자만으로 작동하는 분야지만
공간에 대한 정서와 기억, 낭만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초현실부동산, 이름이 재미있어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분야가 부동산 시장이잖아요. 돈, 평수 등 숫자만으로 작동하는 분야이지만 저희는 그곳에서도 공간에 대한 정서와 기억, 낭만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현실을 뛰어넘은 초현실적 얘기인 거예요. 애초에 돈 벌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초현실적 생각을 유지해보자는 의미로 초현실부동산이라는 이름을 짓게 됐어요.

초현실부동산이 최근 중개를 맡은, 약 100년의 역사를 지닌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 점포주택 / ©전명희

최근 진행한 초현실부동산의 프로젝트를 한 가지 소개해주세요.
지난달 중순에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100년 정도 된 화교 점포 주택에 관한 의뢰가 들어왔어요. 이렇게 작업이 들어오면 원래 부동산을 본업으로 삼는 분들은 수익을 남기기 위해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적게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이게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의뢰가 들어오면 일단 구성원이 모두 모여 다 같이 답사를 가요. 그 공간을 즐기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너는 토지대장이랑 이런 거 찾아보고 나는 국가기록원 아카이브 뒤져볼게’ 이런 식으로 역할을 나눠 그 건물에 대한 이력을 추적해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면 중개를 위한 저희 사이트에 올려요. 그 공간을 의미 있게 계승하면서 쓸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죠. 어떻게 보면 클라이언트 일에 제가 좋아서 먼저 움직이는 거잖아요. 이런 프로젝트는 철학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념적으로 저를 충족시키는 배터리 같아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애정은 최근 발간한 산문집으로도 이어졌어요.
<모든 장소의 기억>이라는 책을 썼어요. 제가 건축, 공간 기획, 디자인 등 일로써 바라보는 공간이 아닌 일상적으로 늘 접하는 곳에 대한 생각을 담았어요. 너무 평범해서 어떨 땐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소, 예를 들면 아파트 상가, 지하 주차장, 목욕탕, 지하철 같은 공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 썼어요. 장소라는 건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기억과 경험이 깊숙이 배어 있는 주관적인 심상, 즉 마음의 풍경이라고 생각해요. 전혀 생각나지 않던 것이 우연히 그 장소를 지나갈 때 선명히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책에 등장한 여러 장소 중에서도 대표적인 한 곳에 관해 소개해줄 수 있나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인 사이트앤페이지에 대한 얘기도 책에 나와요. 제가 팀원들을 이끌고 일하는 곳이라 더 애착이 가기도 하죠. 매주 월요일 오전에 문을 열고 들어와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사무실을 청소하는 때가 제겐 아주 행복한 순간이더라고요.

올해 계획 중인 일은 무엇인가요?
최근에 지역 단위의 도시재생 사업에 많이 관여하고 있어요. 유휴공간이나 슬럼화된 공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여러 방안을 고민하죠. 상업시설이나 문화시설에 대한 공간기획 작업도 있는데, 부산 송도 앞바다를 끼고 있는 카페의 공간기획과 브랜딩 작업이 한창이에요. 그리고 기록 작업은 글이나 책뿐만 아니라 영상, 사진, 웹 등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작업 중이에요. 서울시와 함께 도시 계획의 미래라는 주제를 가지고 도시를 바라보고 기록하고 그 가치를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있고요. 물론 건축과 공간을 다루는 디자인북과 브랜드북도 지금 5권 정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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