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물처럼 흐르는 방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새로움에 살다, 빌리브

기억이 물처럼 흐르는 방
미술 작가 지현정

Text | KaKyung Baek
Photos | Hoon Shin

길게 땋은 머리, 밧줄, 우물, 기묘한 방 등을 구아슈 기법으로 그려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미술 작가 지현정을 그의 작업실 겸 집에서 만났다. 남양주 지둔리에 위치한 조용하고 독립적인 전원주택에서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다.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나요?
해외에서 계속 활동하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계속 전시 일정이 있었고 가족과도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평화롭게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 미술품 경매 기업 소더비와 아트 에이전시 MvVO 아트가 함께 기획한 단체전에 뉴욕 컬렉터와 미술관 디렉터가 뽑은 작가 7인에 선정되었죠.
제가 2017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곳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후 인턴 생활을 시작했거든요. 몇 달 뒤에 소더비와 MvVO 아트가 함께 기획한 단체전에 작품을 내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때 MvVo 아트와 같이 소더비 전시를 하고 출품 작가들에 대해 투표를 하더라고요. 거기서도 7명 안에 들어서 그 인연으로 MvVo 아트와 매년 한 번씩 전시하고 있어요.

마음의 방, 종이위에 과슈, 100 x 71 cm / 지현정 제공
틈사이로, 종이위에 과슈, 51 x 61 cm / 지현정 제공

마음의 방’, ‘틈 사이로등의 작품을 보면 무너지는 방의 이미지가 등장해요. 방이라는 공간은 캔버스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제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캔버스 안에 방 이미지를 넣었어요. 제가 그림을 그릴 때 생각하는 키워드는 마음, 감정, 기억이에요.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풀어내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억이 아닐까요. 지나간 모든 순간이 기억이라는 데이터로 저장되어 있잖아요.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거를 기억하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그림 속 방의 틈에서는 물이 새어 들어와요. 물은 기억, 감정을 상징해요. 또 어떻게 보면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물에서 태어나기도 했고요. 방 안으로 물이 들어오면서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의 기억에 빠진다’, 그런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방이라는 구조가 중요했어요.

 

주로 어떤 기억에서 모티브를 얻나요?

한 가지 기억에 대한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기억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한 작업을 더 많이 해요. 제 그림에 큰 사람, 작은 사람도 있고 사람이 많이 있는데요, 저 자신이거든요. 여러 타임라인 안에 있던 자신이 마음이라는 공간에 모여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과정,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과정을 표현한 거예요.

물의 상징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세요.

마음속에서 감정이 굳어 있으면 썩고 아프잖아요. 물도 고이면 썩듯이 감정도 흘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물과 감정은 그런 면에서 닮은 것 같아요. 물이 되게 위험하고 예민하게 변할 수도 있는데 감정도 그렇잖아요. 우울함이 저를 덮칠 때도 있고요. 감정의 요소를 물이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요.

과슈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과슈(수용성의 아라비아고무를 섞은 불투명한 수채물감)로 작업하는 방식은 오일이나 아크릴, 수채화로 하는 거나 비슷한 거 같아요. 유화랑 다르게 윤기도 없고 차분하지만, 색감은 엄청 화려하거든요. 오일은 채색 표현을 하기 힘든 데 반해 과슈는 되게 세세한 표현이 가능해요. 사용법에 따라서 두껍게 바를 수도 있고 수채화처럼 얇게 풀어서 쓸 수도 있어요. 복잡한 색감이나 물감 본연의 질감을 살리는 마티에르 기법을 쓰기에도 좋은 것 같아요.

미술 작가가 된 계기가 있나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사실 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유학 생활을 했는데, 대학 가기 1년 전쯤 미술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어요. 제가 친구가 별로 없어서 주말마다 선생님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제일 친했던 분이 미술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과 주말마다 학교에 같이 나와서 그림 그리고 학교 밖에 크로키 수업이 있으면 같이 듣곤 했는데, 언젠가 선생님이 제게 미술대학에 가면 잘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미술대학을 갔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미술은 제 안에만 품고 있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해보라고 하니, 그런 것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작가님 그림을 보면 그 안에서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마치 짧은 소설을 한 편 읽는 것 같기도 하고요. 평소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나요?

제가 처음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도 책과 관련이 있어요.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좋아해요. 그 작가의 책을 읽다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어요. 주인공이 겪는 일, 감정을 함께 느끼면서 ‘내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이걸 표현해보고 싶더라고요. 작업할 때는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상징을 이용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는 책에서 새는 시간의 태엽을 감아 과거로 돌아가는 상징으로 쓰이거든요. 그런 의미를 그림으로 가져와 새를 그리기도 하고요. 지금 건너편에 보이는 ‘우물’이라는 작품도 어떤 책을 모티브로 한 거예요. 그 책에서 주인공은 감정적으로 무너질 때 우물 안에 들어가요. 그 우물 안에는 물이 없어요. 주인공은 우물 속에서 생각에 잠기고 과거로 돌아가죠. 과거에 자신이 놓쳤던 것을 찾으면서 우물 안에 점점 물이 생기고 결국 주인공이 건강해진다는 얘기죠. 그런 요소를 가져와 그렸어요.

“가끔 이 집은 너무 평온해서 무섭기도 해요.
‘이렇게 아무 일 없어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조금 일상적인 방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방의 모습이 있나요?
어렸을 때 유학을 갔기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기숙사, 하숙집을 전전했어요. 개인적인 제 공간이 없었죠. 남의 집에 얹혀살면 문제가 많기 마련이잖아요. 집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나간 적도 있고요. 많이 떠돌아다니며 살았어요. 한국에 돌아와 제 공간이 생겨서 안정감을 느꼈고요. 그런 이유에서 제가 방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 같기도 해요.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집은 지하 1층 하숙집이었어요. 그 집엔 위층에 사는 집주인의 고양이 12마리가 상주해 있었죠. 깜깜한 밤에 화장실에 갈 때면 허공에 고양이들 눈이 이렇게 번뜩이고 있었어요. 고양이가 자다가 꼬리로 찰싹찰싹 때리고요. 제가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이 됐어요. 너무 많은 집을 돌아다녀서 모든 집이 다 기억이 희미하거든요. 그런데 고양이 덕분에 그 집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현재 머무는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가끔 이 집은 너무 평온해서 무섭기도 해요. ‘이렇게 아무 일 없어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해외 생활을 할 때는 걸핏하면 뭔가 잘못돼서 늘 긴장하면서 살았거든요. 한국 오니까 가족과 지인들이 너무 잘 챙겨주셔서 평온을 느껴요. 저는 원래 야행성인데 이 집에 와서는 아침에 되게 일찍 일어나요. 밖에 나와서 햇빛을 받으며 가만히 있으면 좋더라고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이 있나요?

이 집이야말로 제가 항상 꿈꾸던 집이에요. 조용하고 독립적인 곳에 있어서 작업하기 정말 좋거든요. 더는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는 것 같아요. 해외 생활을 할 때는 캐리어 2개로 언제든 옮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거든요. 이 집이 제 첫 번째 집이라 그런지 더 만족스러워요.

 

올해 계획한 일에 대해 들려주세요.
현재는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어요. 상수동의 맨션나인에서 ‘Piece of Memory’라는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죠. 5월에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리는 전시에도 참여할 예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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