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실제 집으로 본 ‘문화와 역사가 흐르는 집’ | 신세계 빌리브
Sunday, June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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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실제 집으로 본 ‘문화와 역사가 흐르는 집’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Text | Kay B.
Photos | Hyehwa1117

근대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인 최지혜는 3・1운동과 독립선언문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가족이 살던 집 딜쿠샤를 재현했다. 반세기 넘게 닫혀 있던 딜쿠샤의 문을 활짝 열기 위해 그는 우산꽂이, 찻주전자부터 캐비닛, 벽난로까지 크고 작은 살림살이에 당대의 역사와 예술을 다시 불어넣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행촌동의 오래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450년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굵은 밑동으로부터 건실하게 뻗은 나뭇가지는 동네 이름에 ‘은행나무 행(杏)’ 자를 쓰게 만들 정도로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바로 옆으로 보이는 건물,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의 집은 딜쿠샤Dilkusia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

딜쿠샤는 1920년대에 조선에 머물며 활동한 사업가이자 3・1운동과 독립선언문,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해외통신원 앨버트 테일러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다. 그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국 AP 통신사에 타전한 기사로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그는 영국인 연극배우 메리 린리와 결혼해 함께 딜쿠샤를 일구어나갔다. 서대문구 근처에 신혼집을 마련한 메리 테일러는 어느 날 권율 장군 집터를 산책하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았고 그 동네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매물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입한 딜쿠샤의 집터에 1923년, 소달구지와 지게의 힘을 빌려 정초석을 놓았다.

테일러 부부는 동서양의 문화에 대한 안목이 있었고 남다른 취향을 가졌으며 재력이 있었다. 그들은 근대 한복판에서 동서양의 가구, 소품, 집기로 딜쿠샤를 그야말로 궁전처럼 가꾸었다. 하지만 딜쿠샤도 시대를 비켜 갈 수 없었다. 앨버트가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고 1942년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조선을 떠나야만 했다. 딜쿠샤는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가 여러 세입자에 의해 방과 거실이 여러 개로 쪼개지기도 했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딜쿠샤는 2016년 테일러 부부의 손녀인 제니퍼 린리 테일러가 딜쿠샤와 관련된 1000여 건의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며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집은 사생활의 무대이자 기억의 핵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이 머무는 근본적인 기억의 장소다."
-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중 -

‘하우스 뮤지엄’이란 유명인의 집, 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집 내부를 재현해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해외에서는 하우스 뮤지엄의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국내에는 사례가 많지 않다. 역사적 건축물의 경우에도 내부에 살림살이, 집기를 재현해놓은 경우는 별로 없다. 건축물 외관도 중요하지만,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 나아가 시대를 대변하는 작고 사소한 물건과 가구, 소품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딜쿠샤에 하우스 뮤지엄으로서 활기를 불어넣은 주요 인물은 근대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인 최지혜다. 덕수궁 석조전 실내를 재현한 경험이 있는 그는 딜쿠샤를 100여 년 전 테일러 부부의 숨결이 남은 공간으로 재현해냈다. 최근 그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테일러 부부의 삶을 이해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당대의 가구와 집기를 구하는 모든 과정을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으로 엮었다.

 

메리 테일러가 딜쿠샤를 기록하기 위해 남긴 메모, 가족들의 오래된 흑백사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을 포함해 이 책에는 딜쿠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거실은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실제로 메리 테일러가 2층 거실을 ‘딜쿠샤의 심장’이라 불렀고 최지혜가 딜쿠샤 내부 재현에서 중심에 둔 것도 1, 2층의 거실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놋으로 만든 촛대, 그릇 등을 유난히 좋아했다. 삼층장 위에 사발과 종지를 올려두고 반닫이 위에 놋쇠 촛대를 장식으로 놓아두었다고 한다. 한국과 영국, 일본, 유럽의 물건이 이 집에 공존했지만, 테일러 부부의 취향과 삶의 맥락에서 딜쿠샤만의 분위기를 냈다. 해외 가구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메리 테일러는 테일러 상회를 드나들며 아름다운 가구를 집에 들이고 이를 사진과 메모로 세세히 기록했다. 딜쿠샤와 딜쿠샤를 만들어나간 부부의 이야기에서 이 집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최지혜 역시 ‘메리 테일러가 이 집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자문하며 딜쿠샤를 재현했다. 그는 역사적 공간을 재현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본성(authenticity)이라고 책 말미에 쓴다. “딜쿠샤는 공간 그 자체를 기억하는 박물관이다. 피지배의 역사, 전쟁과 독재, 개발지상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시간을 이겨낸 공간이자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대선배 격인, 진본성이라는 개념이 확장된 의의를 지닌 곳이다.” 딜쿠샤를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한 시대가 집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집주인의 취향과 애정이 어떻게 쌓이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딜쿠샤는 서울시 공공 서비스 예약을 통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직접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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