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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도시, 커뮤니티, 재생

전지적 양옥집 시점

영화 '남매의 여름밤'

Text | Dami Yoo
Photos | Onu Film

'남매의 여름밤'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에 올랐고, 올해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에서 밝은미래상을, 뉴욕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영화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는 한 가족의 관계를 선선한 여름밤 기억처럼 여유롭지만 강하게 묘사한다. 이 이야기가 유독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근사한 집에 있다.







다세대주택에 살던 세 식구가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동네를 뒤로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서울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할아버지의 양옥집이다. 팔자형 경사 지붕에 풀이 무성한 텃밭, 볕이 깊게 드는 2층 베란다까지 고즈넉한 정서가 만연한 50년 된 집이다. 어린 두 남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면에서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무려 1992년도 체육대회 마크가 새겨진 낡은 수건, 운동기구 위에 켜켜이 쌓인 옷 무더기, 안방을 차지한 화려한 자개장 등 생활감이 뚝뚝 묻어나는 일상적인 풍경은 지극히 생생하다. 이렇게 친근한 영화 속 장소는 특별한 볼거리이자 관객에게 지난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는 촉매제다.









남매는 할아버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을 둘러본다. 새로운 곳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찾기 위해서다. 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옥주는 2층에 커다란 모기장을 펼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든다. 동주는 옥주 근처를 얼씬거리다 이내 쫓겨난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이혼을 마음먹은 고모는 이때를 틈타 할아버지 집에 들어와 머문다. 하지만 영화는 한 집에 모여 살기 시작한 이들의 구체적인 사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남매에게 엄마는 왜 없는지, 옥주는 왜 엄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지, 고모는 왜 이혼하려고 하는지, 아빠는 어쩌다 사업에 실패했는지, 조목조목 말하기보다는 집 안 곳곳의 공간을 비춘다. 이 오래된 집은 마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듯하다.



실내 계단에 설치된 중문이나 방 구석구석에 엉뚱하게 놓인 잡동사니, 대문 위에서 열매가 익어가는 포도나무까지, 무질서한 생활의 흔적이 어딘가 자연스럽고 오히려 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장소가 아니면 안 되는 영화가 있다. <남매의 여름밤>이 그렇다. 인천에 위치한 이 집은 실제 노부부가 아이들을 기르고 출가시킨 집이다. 감독은 이 보석 같은 집을 발견하면서 시나리오를 다시 고쳤다. 원래의 시나리오에는 할아버지의 텃밭이 관리가 안 된 채 황폐한 느낌으로 존재했는데, 이 집을 보고 텃밭의 푸르름을 살리는 방향으로 전면 수정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식물에 물을 주며 환하게 웃는 장면, 아빠와 동주가 방울토마토를 따는 장면 등은 계절의 풍성함을 극대화한다. 실내 계단에 설치된 중문이나 방 구석구석에 엉뚱하게 놓인 잡동사니, 대문 위에서 열매가 익어가는 포도나무까지, 무질서한 생활의 흔적이 어딘가 자연스럽고 오히려 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아무리 미술 세팅을 잘하더라도 실제 공간에서 발하는 의외성이나 디테일은 따라 할 수가 없다. 윤단비 감독은 이를 두고 ‘머리로 쓴 시나리오라면 만들지 못했을 장면’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결정적 순간은 이 집이 만든 셈이다.









여름밤, 아빠와 고모가 집 앞 슈퍼에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건강이 위독해진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야 하나, 그러면 이 집을 내놓아야 하나 그런 얘기다. 이때부터 영화 전반에 긴장감이 감돈다. 귀하고 오래된 것들이 한순간 사라질 것 같은 초조함이다. 옥주 역시 아빠가 집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집은 우리의 최초의 세계이며 한 영혼의 상태’라고 말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이 떠오른다. 이 영화 속에서 누구보다 묵묵하게 자리를 지킨 ‘할아버지’와 ‘집’이 위태로워지며 가족의 관계는 아득해진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집은 1970년대 중산층 생활을 반영한 통속적인 주거 양식으로 소위 ‘불란서 주택’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양옥집은 다세대주택으로, 그다음에는 신축 아파트로 바뀌며 도시 풍경이 변화했다. <남매의 여름밤>은 위태롭게 변하는 집을 통해 한 시대가 물러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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