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마개, 안대, 아로마 세러피, 수면 호흡법 모두 동원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잠자는 여행에 동참하길 권한다. 2023년 여행 트렌드는 정신적 안정과 신체적 건강을 찾는 웰니스 트렌드와 이어지는 ‘슬리핑 투어리즘sleep tourism’이다. 호텔은 스파보다 객실 수면용품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고, 스트레스를 낮추고 이완을 유도하는 각종 운동·명상 프로그램 운영뿐만 아니라 수면 전문가와 함께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하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영국 런던 벨몬드 카도간 호텔
잠을 자려고 여행을 떠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밤에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가 전 세계 인구의 30~45%를 차지한다. <임상 수면 의학 저널>은 팬데믹 이후 수면의 질이 떨어졌다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불면증의 원인은 다양한데, 스트레스나 걱정 등 심리적 요인, 우울증과 불안증 등 정신적 문제, 수면 호흡 장애 같은 수면 장애, 불규칙한 수면 습관 등이 있다. 불면증이 무서운 것은 일단 한번 생기면 1년 이상 지속되면서 만성화된다는 점. 유튜브에서 ASMR을 들어도 도통 잠들지 못하는 현대인을 위해 각종 수면용품, 숙면 상품, 건강 상품이 등장하면서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 수면과 경제의 합성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파크 하얏트 뉴욕 내 회복 수면 객실의 브라이트 연동 앱 화면
그에 따라 신소재 베개, ‘억’ 소리 나는 매트리스, 사각사각거리는 기분 좋은 호텔 침구 외에도 침실의 온도·공기·조명 등 환경 요건을 변화시키는 전자 제품과 정보 통신,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등의 첨단 기술로 수면 상태를 분석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을 접목한 기계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수면 환경을 조성한다고 해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현대인이 많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수면 그 자체가 아니라 긴장과 스트레스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피곤하다고 느낄 때 우리 몸은 각성 상태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당연히 수면을 방해한다. 악순환의 연속.
“이제 잠을 자려고 휴가를 가야 한다. 2023년 여행 트렌드는 ‘슬리핑 투어리즘’이 될 것이다.”
30년간 하버드 의과대학과 매사추세츠 의과대학에서 수면을 연구해온 불면증 치료 전문가 그레그 제이콥스Gregg Jacobs는 책 <하버드 불면증 수업>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잠들어야 한다’, ‘최소 7시간은 자야 한다’ 등 정해진 규칙과 원칙을 버리라고 말한다. 수면제 대신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인지 행동 치료로 긴장을 이완시키고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방법으로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휴가철에 달콤한 잠을 잤다고 고백한다. 알람 소리 없이 아침에 눈을 뜨고, 바다에서 햇볕을 쬐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대신 밖으로 나가 각종 수상 스포츠를 하면서 적당히 운동을 즐기는 시간. 일탈과 자유가 허락된 시간에 수면 생체 리듬은 신기하게도 멀쩡하게 돌아온다.
파크 하얏트 뉴욕의 브라이트 회복 수면 객실
<콘데나스 트래블러>와의 인터뷰에서 퍼론 인터내셔널 대표 줄스 퍼론Jules Perowne은 “이제 잠을 자려고 휴가를 가야 한다”며 2023년 여행 트렌드는 정신적·사회적 안정과 신체적 건강을 찾는 웰니스 트렌드와 이어진 ‘슬리핑 투어리즘sleep tourism’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호텔은 스파보다 객실 수면용품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고, 스트레스를 낮추고 이완을 유도하는 각종 운동·명상 프로그램 운영뿐만 아니라 수면 전문가와 함께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하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슬리핑 투어리즘의 목적은 집에 다시 돌아간 후에도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불면증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신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배우고 자신에게 맞는 수면법이 무엇인지 배우는 일이죠.”
이처럼 요즘 호텔에서 제공하는 수면 프로그램은 하룻밤의 꿀잠보다 자신의 집에서도 수면 패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보다 기술적이고 전문적이다. 파크 하얏트 뉴욕의 브라이트 회복 수면 객실(Bryte Restorative Sleep Suite)은 예약자가 밀려 있는 상황이다. 객실에는 인공지능 기술을 장착한 매트리스 브라이트의 킹 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다. 적당히 몸에 압박을 가하는 이불, 수면 자세에 적합한 베개뿐 아니라 수면에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갖췄다. 브라이트 매트리스는 자세가 바뀔 때마다 매트리스 코어 압력을 분배해 몸을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주고 온도 조절도 해준다. 또 핸드폰과 연결, 원하는 명상 음악에 따라 매트리스 코어가 움직이면서 온몸을 이완시켜준다.
스웨덴 명품 매트리스업체 해스텐스의 해스텐스 슬립 스파 호텔
스웨덴 명품 매트리스업체 해스텐스는 포르투갈 코임브라에 해스텐스 슬립 스파 호텔을 개장했다. 한화 5억 원 정도에 팔리는, 말총 소재 수제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는 사실 외에도 18세기 바로크 양식, 고서적으로 둘러싸인 책장과 책 모형 조각품으로 둘러싸인 욕조, 하루 종일 볕을 만끽할 수 있는 테라스 등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주는 수면 효과를 체험할 수 있다.
만다린 오리엔탈 제네바는 스위스 민간 의료 수면 클리닉 세나스Cenas와 협력, 손님들의 수면 장애를 적극적으로 살피고 해결책을 찾아주는 3일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CNN
영국 런던 벨몬드 카도간 호텔은 명상, 최면, 수면 전문가 말마인더 질Malminder Gill과 함께하는 수면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질문지를 통해 수면 상태를 파악한 후 그에 따라 조언과 방법을 제공하고, 결과를 바탕으로 객실 내에 다양한 수면용품을 배치한다. 원한다면 직접 수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을 수도 있고 수면 유도 최면 세러피를 신청할 수도 있다. 말마인더 질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거창한 세러피가 아니라 매일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수면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잠자는 여행은 자야 한다는 강박과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를 여행지에 모두 내려놓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는 여정이다. 불면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해도 더 이상 침대 위에 눕는 시간이 괴롭지 않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하나, 둘 양을 세는 대신 따스한 볕을 받으면서 산책하고 자유를 만끽하던 휴가를 상상할 수도 있다. 얼굴, 어깨, 팔다리 순으로 몸에 힘을 쭉 빼고 여행의 추억과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가다 보면 어느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면 이불을 떨치고 나와 떠날 준비를 하자. 숙면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춘 호텔들이 생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