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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살아온 집, 살아갈 집

책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Text | Kakyung Baek
Photos | Jaeyoung Ha

하재영은 유복한 시절을 보낸 대구 ‘명문 빌라’가 엄마에겐 어떤 희생을 요구했는지, 비로소 내 집을 갖게 되었을 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먼저 고백한 이유라든지 그동안 거쳐온 집들을 통해 내밀한 삶의 기억을 들려준다. 그 흥미로운 역사를 통해 집 안팎에 존재했던 여성, 앞으로 존재할 여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집에 산다. 누군가가 살았던 집의 역사에 대해 듣는 것은 아주 내밀하고 원초적인 일이다. 집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내 방은 있었는지, 그 집에서 꿈꾸던 미래의 집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집에서 가족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최초의 집을 떠올리면 슬픈지 기쁜지 잊고 싶은지. 살아온 집의 역사는 내밀하다 못해 앞으로 살고 싶은 삶의 모습까지 언뜻 보여준다.

 

최근 발간한 하재영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작가가 살아온 집을 유려한 문장으로 공감할 만한 여러 에피소드를 묶은 책이다. 특히 저자가 여성이란 자아로 집을 인식하는 과정, 집의 의미를 확장해가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담하게 녹여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서평에 이렇게 적었다. “생애사는 곧 집의 역사다. (중략) 모든 글쓰기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지만, 그중 가장 어려운 글은 자신이 주제가 되는 이야기다. 이 책은 그 모델이 될 것이다.” 하재영이 어렵게 풀어낸 집의 역사는 ‘여성에게 집의 의미와 존재는 무엇인지’ 돌아보도록 물꼬를 터준다. 긴장을 늦출 틈이 없다. 못 부리처럼 매섭게 튀어나온 질문들에 혼자 입속말로 대답하다 보면 당장에라도 노트를 꺼내 내가 살아온 집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책 말미에는 이 책을 쓴 의도가 제법 선명히 드러난다. “이 책은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 또는 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자전적이지만,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 시도를 통해 나의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을 소망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밑줄을 긋고 페이지 모서리를 자주 접어두었지만, 그중에서도 몇 가지 잊히지 않는 대목을 소개한다.

 



행복한 집이 아니었던 최초의 집을 회상하며

저자는 앞으로 집은 자신에게 무엇이어야 하는지 되묻는다.

 



첫 번째는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최초의 집을 ‘다크 헤리티지’로 표현한 부분이다. 저자는 대구 북성로의 전원주택에 살았다. 그 집에는 집안일을 전담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값비싸고 웅장한 가구로 가득했다. 작가는 이렇듯 풍족했던 유년 시절 엄마의 삶을 재조명한다. 겨우 서른 살의 나이로 홀로 다른 성씨로 살아냈던 엄마의 삶, 다른 식구들 모두 각자의 공간이 있음에도 독립된 서재 하나 갖지 못한 엄마의 삶을 애잔하게 들여다본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엄마를 찾다가 올라간 안방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웅크리고 있던 엄마. 어린 나이의 하재영은 엄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말끝에 묻어난 울음기 때문에 겁이 났다고 쓴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만연했던 그의 집을 부정적 문화유산을 뜻하는 '다크 헤리티지'로 표현한다. 폭력이 깃든 장소라 하더라도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장소로서 말이다. 이처럼 모두에게 행복한 집은 아니었던 최초의 집을 회상하며 저자는 앞으로 집은 자신에게 무엇이어야 하는지 되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저자가 비로소 처음 원하던 집을 가졌을 때부터 희미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 형편이 어려웠던 본가에서 나와 서울의 하숙방, 원룸 등을 전전했다. 동생이랑 같이 살 때도 소설을 써서 어엿하게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누군가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저자는 서른두 살, 동생과 갈라서 소설이 아닌 생계형 글쓰기를 해나간다. 이렇게 마련한 보증금으로 얻은 새집, 그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저자의 마음도 행동도 제법 달라진다. “그 집에서 처음 했던 또 다른 일은 예전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다섯 살 아래 범준이라는 후배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이었다.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커다란 거실을 자신의 작업실이자 서재로 사용하며,

각각의 독립된 공간에서 그가 오랫동안 소망했던 방식대로 살고 있다.

 



관계에 소극적이던 내가 범준에게 먼저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에게 의존적이었던 이전과 달리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여도 괜찮았으므로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여자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하재영 역시 수많은 집을 거치면서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나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그는 남편과 함께 살지만 커다란 거실을 자신의 작업실이자 서재로 사용하며, 각각의 독립된 공간에서 그가 오랫동안 소망했던 방식대로 살고 있다.

 

그가 책에서 인용한 샬럿 브론테의 말처럼 “홀로 있을 때만큼이나 자유롭고 여럿이 있을 때만큼 즐거운” 그런 상태로 말이다. 책에는 에밀리 디킨슨, 김혜순, 정희진, 아니 에르노, 아고타 크리스토프 등 걸출한 여성 작가들의 인용구가 많이 등장한다. 저자가 여성으로서 집의 의미를 좇는 과정에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때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준 문구들이다. 아직 자신의 방이 없거나 집이 있더라도 온전히 나의 공간으로 인식할 수 없는, 불완전한 사람들에게 저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글이 가닿기를 바란다. 불완전한 누군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공간, 완전한 거처를 꿈꾸면서 말이다. 이제 당신도 입속말로 답을 해보자. 어떤 집에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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