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번화가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레스토랑 잇다프로젝트. 그런데 식당 손님만 드나드는 게 아니다. 주말농장에서 수확했다는 채소를 가져다주는 아주머니가 오고,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와 손녀가 쉬었다 간다. 앞집 청년이 책을 빌리러 오는가 하면 아이가 반려견 배변 봉투를 한 장 얻으러 오기도 한다. 엄연히 메뉴판을 두고 운영하는 식당에서 익숙한 듯 자기만의 볼일을 마치고 가는 이 정갈한 질서는 도대체 무엇인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
디자인아이라는 아동 출판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한 지 18년 됐어요. 그리고 2015년 연남동에 어쩌다집이란 공유 주택을 지어 5가구의 어쩌다 가족과 살며, 2019년부터 잇다프로젝트란 레스토랑 겸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진짜 N잡러네요.
어쩌다집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죠. 5층이 남편과 저, 반려견 보리가 사는 공간이고요, 그 아래층은 디자인 스튜디오, 1층이 잇다프로젝트예요.
어떤 계기로 공유 주택을 지었나요?
원래는 공유 작업실을 만들고 싶었어요. 출판 디자이너로 한 20년 일하다 보니까 일러스트레이터, 에디터, 사진작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감독 등 재미난 일을 벌이는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같이 모여서 일하면 시너지가 대단할 것 같은 거예요. 재미있겠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구상해보니까 프리랜서에게 집세가 아닌 작업실의 고정 지출은 공포 대상이더라고요.(웃음) 자연스레 집으로 관심이 옮겨갔죠. 그런 생각을 한 게 2010년쯤이고 1~2년 정도 공유 주택을 구상하다가 대지를 알아보고 어쩌다집을 지었어요.
연남동에 자리 잡은 계기가 있나요?
망원동과 연남동, 후보지가 두 군데였어요. 건축가인 남편과 한 달간 주말마다 2시간씩 동네를 돌아다니며 행인이나 근처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 표정과 분위기를 관찰했어요. 그때 느끼기로 연남동에는 인간미가 있었어요. 골목을 서성이고 있으면 동네 어르신이 “내가 어디 맛집 알려줄까요?” 하고 먼저 말을 거셨죠. 저희 판단은 정확했어요. 실제로 살아보니 다들 얼마나 살가운지 몰라요. 공사 소음 때문에 죄송스러워 떡을 돌리러 갔더니, 집 짓는데 어찌 안 시끄러울 수 있느냐며 이해해주시고, 요즘도 이따금씩 미나리, 상추, 감 등을 한 바구니씩 가져다주세요. 감사하니까 저도 뭐든 있으면 나누려고 하죠. 테라스에 앉았다 가시라고 자리를 만들고 반려견 배변 봉투도 한 묶음 꺼내놓고요.
원래도 외향적인 성격인가요? 동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즐기는 모습이 멋져요.
20~30대 때는 인생의 1순위가 일이었어요. 매사에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었죠. 1년 열두 달 중 열한 달은 미친 듯이 일하고 1개월은 여행하며 재충전하고 다시 일하고, 그러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고 있다고 느끼며 만족해했어요. 근데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제 삶을 들여다보니까 어쩐지 바뀐 게 없어요. 쳇바퀴같이 한자리를 맴도는 삶이더라고요.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생각하고 그때부터 제 삶과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모이고 공유하면 일상이 풍요로워진다는 마음을 모아 어쩌다집을 짓습니다.”
집 짓기가 새로운 챕터를 열어주었겠네요.
상량문에 그 마음이 적혀 있어요. 강병인 선생님이 써주신 글인데 “모이고 공유하면 일상이 풍요로워진다는 마음을 모아 어쩌다집을 짓습니다. 하늘의 햇님 달님 별님은 감응하시어 함께하는 이들에게 오복이 깃들게 하소서.” 글 아래위에 있는 용 용(龍) 자와 거북 구(龜) 자는 물과 관련되어 있어 화재를 막아준다는 의미예요. 원래 상량문은 한옥에 썼으니까요.
어쩌다 가족만의 특별한 룰도 있나요?
한 달에 한 번 반상회를 빙자한 식사 자리가 있어요. 한 지붕 아래 사는데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밥 한 끼 함께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어요. 밥 먹으며 서로 근황을 얘기하고 하는 일을 응원도 하죠. 분리수거에 관한 공지 사항부터 여행 다녀온 얘기, 영화 얘기, 브랜드 론칭 얘기, 근처 맛집 정보 등 다양한 소식을 나눠요. 1층 잇다프로젝트에서 주로 만나지만 순번을 정해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만나기도 해요. 물론 비정기적인 번개도 종종 있고요.
잇다프로젝트 상호가 특이해요. 음식점이면 보통 이름에 ‘레스토랑’ 또는 ‘식당’을 넣잖아요.
제가 만들고 싶은 1층 공간은 음식점 기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어쩌다 가족 간의 커뮤니티가 이어지고 확장되어 이웃과 교류하는 그런 장소를 원했죠. 그래서 최초 임차였던 레스토랑이 나간 다음 입주할 다른 식당을 알아볼 때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어요. 매장 앞 테라스가 동네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면 좋겠다, 어쩌다집 입주민을 위한 혜택이 있으면 좋겠다 등.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조건이 부담 되었던 것 같아요. 그쪽에서 망설이는 걸 보고 남편이 저한테 “당신이 운영해보면 어때?”라고 제안했고, 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럴게” 하고 식당 외 커뮤니티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실행해보기 위해 이 공간에 ‘잇다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어떤 프로젝트를 해보았나요?
전시가 대표적이죠. 저에게 전시는 작가와 소통하고 저를 돌아보는 익숙한 일상인데 이웃 분들이 ‘나는 전시 잘 모르겠다. 어렵더라. 가도 금방 둘러보고 나온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분들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는, 좀 더 친근한 소통 방법으로 잇다프로젝트에서 작품 전시를 열기 시작했어요. 이런 동네 식당에서 작품을 보면 조금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하고요. 분명 효과가 있어요. 잇다프로젝트 입구에 세워둔 델로스 작가의 2.5m 높이 앨리스 목각 인형을 반납했을 때 느꼈어요. 맞은편 건물에 사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열면 그 인형이 보여서 기분 좋았는데 없어져서 서운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르신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요. 처음엔 작품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차차 들여다보고, 작가를 궁금해하고, 나중엔 작품을 구입해 간 손님도 많아요. 이 밖에 미술사 강연, 드로잉 원데이 클래스, 쿠킹 클래스 등도 진행했어요. 지금 오시면 채병록 작가의 <길상만첩> 전시를 볼 수 있어요.
곳곳에 강아지 사진이 보이는데 반려견 보리인가요?
저희 식구예요.(웃음) 그래서 잇다프로젝트는 반려견 동반이 가능해요. 연남동에 특히 반려 가족이 많거든요. 산책하다가 여기 테라스에서 쉬면서 친구를 만들기도 하죠.
출판 디자인 일도 계속하나요?
물론이죠. 근데 재미있는 일 위주로 해요.(웃음) 지난 7~9월에는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책 만들기 워크숍을 기획해 진행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자기 이야기가 담긴 책을 한 권씩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참여자들의 표현 하나하나가 주옥같았어요. 100종의 지류와 패브릭 중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고르라고 했더니 어떤 분은 두껍고 거친 크라프트지를 구겨서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로 딱딱해진 마음이라 말했고, 어떤 분은 물에 젖지 않고 찢어지지 않는 유포지를 골라 누가 뭐라 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신이라고 말했어요. 이들의 표현과 삶의 태도에서 어찌 배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Writing me 내 인생 첫 번째 소리책’ 워크숍 과정과 결과물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시까지 열었어요. 가족을 비롯한 관객들이 울컥해하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잇다프로젝트 시즌 2’를 시작한다고 하던데 어떤 의미인가요?
셰프가 바뀌는 시기에 맞춰 시즌 1을 정리하고 5개월의 재정비 시간을 거친 다음 시즌 2로 문을 열어요. 시즌 1의 콘셉트가 와인과 수입 식자재 중심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면 시즌 2에는 가능한 한 우리나라 제철 식재료와 전통주를 선보이려고요. 그래서 막걸리 학교에서 전통주를 배우고 가드닝 클럽에서 식재료 식물을 키우고 도시 양봉 체험도 하며 분주히 쉬는 시간을 보냈답니다.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일을 작당하고 있나요?
새 셰프를 모시기 위해 면접만 30명 넘게 봤어요. 이력서 검토까지 하면 약 60명의 삶을 들여다본 셈이죠. 그러면서 느낀 건 경력 10~30년 차 지원자 중 70%가 식당을 개업했다가 2~3년 만에 폐업한 경험이 있는 거예요. 모두들 ‘내 가게’란 꿈을 안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불가피한 이유로 중단한 거죠. 아쉽더라고요. 사회적 손실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시즌 2에 지원자를 받아 ‘나도 식당을 해볼까’ 프로젝트를 해보려고요. 주5일제인 잇다프로젝트가 쉬는 이틀간 지원자가 객원 셰프로 매장을 운영하는 거예요. 잇다프로젝트가 그들에게 테스트베드가 되는 셈이죠.
유일무이한 이야기가 펼쳐지겠어요.
해보고 싶은 게 또 있어요. 오랜만에 작심하고 동네를 돌아보니까 재미있고 멋진 가게가 정말 많더라고요. 사장님은 물론이고 아르바이트생까지 어찌나 별난 이야기가 가득한지. 연희동과 연남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는 소식지를 만들어볼까 해요. 결국 이 모든 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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