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물감, 조리 도구, 채소와 과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방. 아티스트 사이토 레이는 프랑스 파리와 남부 아르데슈 스튜디오를 오가며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음식 예술 작업을 한다. 아트 레지던스 참가자들의 식사를 만들기도 하고, 패션 브랜드 행사 케이터링을 맡기도 하고, 갤러리 바닥을 오렌지 젤리로 뒤덮는 등 기묘한 아트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음식 재료를 이용한 회화, 설치, 퍼포먼스 작품 사진을 담은 책 <실존적 요리(Cuisine Existentielle)>(2022)를 보고 저자 사이토 레이Lei Saito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어요.
프랑스에서는 품절인데 다행히 책을 구했네요. 저는 일본인이에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2003년에 프랑스 파리로 왔고, ‘How to Make Flamingo Soup(플라밍고 수프 만드는 법)’이란 작품으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죠. 코코넛 밀크를 첨가한 상큼한 여름 칵테일인데, 새를 사냥한 후 깃털을 이용해 수프를 만든다는 흥미로운 상상력이 담긴 작품이에요. 이때부터 음식을 매개로 한 저의 예술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설치미술가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 스튜디오에 합류하면서 제 작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고 퍼포먼스 성격이 강해졌어요.
음식 재료를 이용한 회화, 설치, 퍼포먼스 작품 사진을 담은 책 <실존적 요리(Cuisine Existentielle)>(2022)
책 제목이면서 본인의 작업을 표현하는 ‘실존적 요리’란 무슨 뜻인가요?
제목은 책 속 에세이를 집필한 예술 비평가들이 붙여준 것이에요. 저는 제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실존적’이란 말은 철학 용어예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단순히 먹고 마시며 사는 생존에 만족하지 않는다. 각자 나름대로 사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자유 선택에 따라 가치를 부여하며 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죠. 제 작품 또한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먹는 음식ㆍ방식ㆍ장소가 결정되고, 작품 해석 또한 달라진다는 뜻으로 ‘실존적 요리’라 불러요. 나름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아요.
당신의 작품은 먹기 위해 존재하니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죠. 결과물이 없으니 소유할 수도 없고요.
맞아요. 무형의 예술에 가깝죠. 극본 없는 다큐멘터리고요. 형태가 없으니 그림이나 조각처럼 사고팔 수는 없지만 가치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 더 예술적이죠. 참여자들은 수동적 감상이 아닌 작품을 주도하는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 자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죠. 그냥 평범한 일상인데 그걸 자각하기 시작해요. 그때부터 일상이 다르게 느껴지죠. 저는 제 작품이 퍼포먼스, 그림, 조각, 사진, 글의 요소를 모두 통합한다고 생각해요.
©Saito Lei
©Saito Lei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푸드 아티스트 작업과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요?
저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제 관심사는 맛있는 음식보다 함께 마시고 먹는 행위를 이끄는 음식 재료예요. 예쁘게 세팅하거나 장난스럽게 연출하는 일은 어쩌면 쉽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음식 재료 자체를 조각이자 회화이며 인간, 세상, 자연을 연결하는 핵심적 조형 언어로 사용해요. 그래서 제 작품에는 그릇과 커트러리가 없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없어요. 누에 블랑슈Nuit Blanch 행사에 선보인 작품 ‘Microclimat’는 염소 치즈를 모래성처럼 쌓고 사람들이 빵과 와인을 마시며 직접 떠먹도록 했어요. 그러다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 땅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등장했죠.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위가 어떻게 예술과 연결되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음식을 먹고 난 후를 생각해요. 음식이 사라지고 잔이 다 비워졌을 때의 분위기와 느낌을 강조하려 하죠. 저는 음식을 도구 삼아 일상의 예술적 속성을 발견하는 예술가라 할 수 있어요.
영향을 받은 예술가가 있나요?
음식을 매개 삼아 삶, 자연, 세상을 드러낸 예술가는 많아요. 존 케이지는 무용단과 전 도시로 공연을 다니면서 먹은 음식에 대한 에세이 [Where Are We Going? and What Are We Doing?]을 출판했고, 버섯을 연구하며 버섯 그림을 그렸죠. 오노 요코는 친구들과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나눈 대화를 책 [Grapefruit]
“음식을 나누는 일은 타인의 삶을 살피고 그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창작 작업이 이 방에서 이뤄진다니 놀랍네요.
남부 아르데슈Ardèche 스튜디오는 좀 넓은데 파리 아파트는 협소한 편이에요. 관련 아이디어는 주로 집 밖에서 얻어요. 요리보다 음식 재료 찾는 일이 더 중요하거든요. 어느 정도 개념이 잡히면 재료를 찾으러 떠나죠.
주방도 작은 편이네요.
예전에는 집에서 요리를 했는데 매번 음식 메뉴가 고민이더라고요.(웃음) 계속 일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집에는 최소한의 것만 있어요. 보통 요리 작업을 할 때는 갤러리나 박물관의 대형 주방을 이용하고 메뉴는 음식 재료의 맛을 중요시하는 터라 불편한 점은 거의 없어요.
벽에 걸린 그림은 모두 본인 작품인가요?
네, 맞아요. 학창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죠. 시간 날 때마다 무엇인지 모를 그림을 그렸어요. 무의식이 이끄는 그림이라고 할까요? 독일 철학자 칸트는 ‘손은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고 말했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뭔가 정리되는 것 같아요. 몸을 쓰니 감각의 즐거움과 몰입의 희열도 느끼게 되죠.
집에 있는 물건 중 가장 아끼는 것이 있다면요?
아마도 여행 가방? 항상 함께하니까요. 프랑스의 두 도시를 오갈 때도, 음식 재료를 찾아 어디론가 떠날 때도 여행 가방을 항상 챙기죠. 리가 국제 현대미술 비엔날레(Riga International Biennial of Contemporary Art) 축제에 참여했을 때도 이 가방과 함께였어요. 라트비아에서 구입한 후 여행 가방에 넣어 온 빵, 채소, 고기 등을 이용해 음식 퍼포먼스를 선보였죠.
그림 그리듯 화이트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는 사진을 보았어요. 음식 세팅을 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점이 있나요?
저는 셰프가 아니잖아요. 장소도 레스토랑이 아니고요. 라면이 주제라고 해도 ‘라면답게 세팅하지 말자’가 포인트일 거예요. 가능하면 음식답지 않게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나려 하죠. 어떻게 하면 새롭고 낯설게 보일 수 있을까, 음식을 소화하기보다 음미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고민해요. 보통 면밀하게 스케치를 합니다.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 계획된 거예요.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열린 이벤트에서는 참수형 당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상시키는 를리지외즈religieuse(슈크림을 쌓아 올려 만든 디저트)를 만들었죠. 메뉴부터 세팅까지 섬세한 창의적 연결 고리가 있어요.
최근에는 세라믹 워크숍도 진행한다면서요.
같은 프로젝트를 계속하다 보면 일이 너무 익숙해지잖아요. 그런 전형성을 피하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음식과 연결 고리가 있으니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음식과 그릇은 방향성이 다른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릇을 만들 때 음식이 들어갈 자리를 비워야겠다 했는데, 생각을 바꿨어요. ‘그릇 자체가 음식이 될 수 없을까?’, ‘그릇 자체로 충분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작업한 것이 디저트 머랭 모양을 한 세라믹 커트러리, 나이프 홀더 작품이에요. 세라믹 작업을 하다 보면 또 음식 재료가 만지고 싶어져요.
전시와 행사 일정이 무척 빡빡한 거 같아요. 두 도시를 오가면서 어떻게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할까 싶을 정도로 일이 많네요.
제가 준비하는 개인 전시 외에 클라이언트 요청 행사도 거절하지 않고 진행하려고 해요. 그것이 다섯 살짜리 꼬마의 생일 파티 케이터링이라 할지라도요. 대부분 제 전시를 통해 만난 소중한 인연이에요. 음식을 나누는 일은 타인의 삶을 살피고 그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음식 예술 작업은 좋은 덕을 쌓는 일이죠. 아마 평생 이 작업을 하게 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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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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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저자 빈센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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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오아시스와 마조렐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