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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없는 와이너리

와인 다운 팝업, 탱크 개라지 와이너리, 라호퍼 와이너리 외

Text | Anna Gye
Photos | Wine Down Pop Up Hotel, Tank Garage Winery, Endless West, Chybik + Kristof Architects & Urban Designers

뉴질랜드 와인업계는 지난해에 비해 와인 판매량이 6%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휘청거릴 줄 알았던 와인 생태계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VR 와인 테이스팅, 온라인 와인 클래스 등을 열고 집에서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포도밭이 없어도, 포도 알갱이가 없어도 와인을 만들어 소개하는 와이너리도 생겼다.



미국 나파밸리 캘리스토가 마을의 탱크 개라지 와이너리



데이터 분석 기관 닐슨Nielsen에 따르면 미국의 상반기 와인 매출은 이동 제한 금지령을 내린 3월부터 급증하기 시작, 최고 40%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온라인 사이트 판매는 무려 400% 이상 급증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피해를 혹독하게 겪을 줄 알았던 와인 생태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집에서 술을 즐기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온라인을 통해 더욱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아예 박스째 와인을 구입하고 있다. 닐슨 조사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H. 저니간David H. Jernigan 교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점점 알코올에 의존한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신의 물방울을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미국 오리건 던디 힐스Dundee Hills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스톨러 패밀리 에스테이트Stoller Family Estate는 로비 옆에 뉴 익스피리언스 센터를 지었다. 와이너리 직원이 수십 명의 손님들을 이끌고 다니는 대신 편안한 소파에 앉아 VR 기기를 쓰고 와이너리 투어를 하는 장소다. VR 기기를 머리에 쓰면 365일 변화하는 와이너리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자, 이제 과거로 갑시다!”라고 스태프가 외치면 수억 년 전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공룡이 눈앞에 등장하고 화산이 폭발하고 부글부글 용암이 끓어오른다. 수억 년 전부터 쌓여온 던디 힐스 지역의 역사가 와인 아로마를 결정한다는 내용을 VR 체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렇게 요즘 와이너리는 VR 기술과 친숙해지고 있다.








직접 와이너리에 가지 않아도 포도밭을 둘러보고 그들이 자랑하는 빈티지 와인을 구해 즐길 수 있다면 과연 앞으로 와이너리는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 호주에서 열리고 있는 와인 다운 팝업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반가운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을 테다. 와인 다운 팝업 프로젝트는 매달 호주의 다른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이동형 컨테이너 호텔 프로젝트다. 포도밭이 한눈에 펼쳐지는 명당 자리에 위치한 컨테이너 내에는 푹신한 침대, 테이블, 커피 머신, 온수 샤워 시설, 야외 데크 시설 등이 알차게 갖춰져 있다.

다른 컨테이너에는 VR 와인 바가 있다. VR 기기를 쓰고 와이너리를 탐방하며 와인을 즐기는, 객실 이용자만을 위한 장소다. 와인뿐만 아니라 마리아주가 될 음식도 준비되어 있다. 잠을 청하는 순간까지 포도밭에서 전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테이스팅 룸이 없어도, 와인 스태프의 친절한 안내가 없어도 하루 동안 와이너리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방식이다.








미국 나파밸리 캘리스토가Calistoga 마을에 위치한 탱크 개라지 와이너리Tank Garage Winery에는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포도나무가 없다. 와인 통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풍경도 없다. 나파밸리 지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128번의 캘리스토가 마을 진입로 주유소가 바로 와이너리다. 줄줄이 서 있는 차들은 기름이 아니라 와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와인 전문가 제임스 하더James Harder와 짐 레구스시Jim Regusci는 마케팅과 전문가 평점으로 만드는 명품 와인에 대한 환상을 깨고 주류 질서를 뒤엎는 실험적 와인을 소개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나파밸리 지역의 소규모 와이너리에서 한 차례, 150병 한정으로 생산하는 핸드메이드 와인을 소개한다. 또 지역마다 그곳에서 자라는 포도를 구해 개라지에서 직접 와인을 만드는데, 가장 최근 출시한 ‘2019 리본Reborn’ 레드 와인은 흑인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은 와인이다.




“포도밭이 없어도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와이너리가 생기게 된 것이죠. 이제 와인은 품종이 아닌 성격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와인 별점 매기기는 시시한 놀이일 뿐이에요.”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시라Syrah 50%, 포도 껍질과 씨앗을 포도알과 함께 발효한 프랑스 론 지방 품종 비오니에(Skin-Fermented Viognier) 50%를 섞은 독특한 제품. 판매 수익금은 더 심플 굿과 블랙 리브즈 매터 챌린지 지원금으로 쓰인다. “와인 양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만드는 오렌지 와인이나 여러 나라 또는 지역의 품종을 블렌딩해 만드는 와인 등 다양한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포도밭이 없어도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와이너리가 생기게 된 것이죠. 이제 와인은 품종이 아닌 성격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와인 별점 매기기는 시시한 놀이일 뿐이에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엔드리스 웨스트Endless West는 포도 알갱이 하나 없이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쌀 없는 사케, 맥아 없는 위스키까지 생산하는, 소위 분자 음료 양조장이다. 이곳은 실험실에서 와인을 생산한다. 이탈리아 모스카토 다스티 와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제멜로Gemello 와인은 복숭아에서 추출한 분자 성분을 이용해 효모, 탄산, 캐러멜 천연 색소, 베타카로틴을 섞어 만든 제품이다. 와인 스펙터 소속 소믈리에들은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과 거의 흡사하다고 평가했다. 실험실에서 와인을 만들면 와인 한 병을 만드는 데 드는 물의 95%, 토양은 80%, 탄소 배출량은 40%까지 줄일 수 있다. 제멜로 와인은 곧 친환경 와인인 셈이다. 가격 또한 15달러로 저렴하다.











더 이상 고지식한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 필요가 없다면 와이너리 공간도 무한대로 변신할 수 있다. 최근 건축 그룹 치빅 + 크리스토프 아키텍츠 & 어번 디자이너스Chybik + Kristof Architects & Urban Designers가 공개한 체코 더 라호퍼 와이너리Lahofer Winery는 와인 저장고, 와인 제조 공장, 레스토랑, 교육 센터, 호텔, 루프톱, 극장을 품고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와인을 연상시키는 각종 단서는 많지만 와이너리에서 예측할 수 있는 풍경은 드물다. 비밀스럽게 숨 쉬고 있는 신비한 와인 이야기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싼 투명한 통창으로 와인 제조 과정이 고스란히 보이고, 빛이 가득한 레스토랑은 사람들이 충분히 거리를 두고 앉을 만큼 공간이 넓다. 포도 덩굴 또는 둥근 와인 통을 연상시키는 아치형 구조가 공간 내외로 반복되는데 이 곡선 디자인은 지붕 위로도 흐른다.

지붕은 계단형 구조로 돼 있어 지붕 위에 올라가 와인밭을 조망할 수 있다. 이 계단형 지붕은 때론 원형극장으로 변신한다. 와이너리 오픈 행사 때 지붕 옥상에서 DJ가 공연하고 사람들이 지붕 위에 앉아 파티를 즐겼다. 천장 전체에는 체코의 현대미술가 파트리크 하블Patrik Hábl의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검은색에서부터 붉은색까지 거친 와인 테루아를 연상시키는 천장 벽화는 와인을 마시려고 고개를 들 때마다 보인다. 더 라호퍼 와이너리는 와인은 결국 자연이고, 와인을 마시는 행위는 곧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존 와이너리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자연과 사람 사이의 공생 관계를 천천히 음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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