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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로컬, 재생, 호텔

스페인 메노르카의 시간이 쌓인 호텔

호텔 에브레삭

Text | Kakyung Baek
Photos | Pol Viladoms

오래전부터 예술 애호가들의 휴양지로 사랑받아온 스페인 발레아레스 메노르카섬에 건축가 에마 마르티가 리모델링한 호텔 에브레삭이 문을 열었다. 영국 통치하 71년, 스페인 통치하 15년, 프랑스 통치하 7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유럽의 여러 문화가 켜켜이 쌓인 이 건물은 8개의 객실을 갖춘 부티크 호텔로 재탄생했다. 마르티는 건물이 지닌 건축 역사를 보존하면서 공간에 빛을 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는 오래전부터 예술 애호가들의 휴양지로 사랑받았다. 낭만적인 중세풍의 마을 풍경은 물론이고 터키석 빛깔의 영롱한 바다, 백사장, 온화한 기후로 지중해의 모든 환상이 모여 있는 곳 같기 때문이다. 발레아스 제도는 마요르카, 이비사, 메노르카, 포르멘테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마요르카, 이비사는 리조트, 클럽 등 환락의 장소로 유명해 발 디딜 틈이 없지만 메노르카, 포르멘테라는 느린 속도로 평화로운 여행을 즐기기에 적합하다. 특히 메노르카는 디자인 전문지 <애저Azure>에서 “현대 디자인의 온상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건축가, 디자이너의 작업을 선보이는 장이 됐다.








건축가 에마 마르티Emma Martí가 최근 메노르카 마오Maó에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호텔 에브레삭Hotel Hevresac을 선보였다.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한 스페인은 기원전 1세기부터 약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게르만족 침입 이후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며 800년간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메노르카는 1700년대 초 영국 해군에 점령당해 지역 일대에서 영국 건축 문화가 드러나기도 한다.



호텔 에브레삭의 토대가 된 건물에도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쌓여 있다. 이 건물은 18~19세기 초에 지었으며 한때 해군 상선의 선장이자 작가인 호안 로카 비벤트Joan Roca Vivent의 집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가 기업가 정신으로 활발한 상업 활동을 하던 무대가 이곳이었으며 영국 통치하 71, 스페인 통치하 15, 프랑스 통치하 7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이 건물에는 유럽의 여러 문화가 켜켜이 쌓였다. 현재 이 건물 소유주인 이그나시 트루욜Ignasi Truyol과 스테파니에 마에Stephanie Mahé는 건물에 쌓인 시간과 역사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활용하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고자 오랜 친구이자 건축가인 마르티에게 호텔 리모델링을 의뢰한 것이다.




이번 작업은 마치 외과 수술처럼 최소한의 조치로 건축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았다.”




건물 소유주인 트루욜과 마에에 따르면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빛이 들지 않아서 실내가 매우 어두웠다. 또한 “새롭게 이 건물을 디자인하기 위해서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장소와 건물이 지닌 마법과 같은 매력은 여전했다”라고 전했다. 이에 마르티는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를 계단, 바닥, 나무 들보 등 역사를 지닌 건축 요소를 최대한 보존하고 건물을 빛으로 채우는 것으로 잡았다. 마르티의 표현에 따르면 이번 작업은 마치 외과 수술처럼 최소한의 조치로 건축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았다.










호텔 에브레삭은 동시대 부티크 호텔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특정 시대의 미감을 최고급으로 표현하기보다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에스닉한 느낌을 풍긴다. 이는 곧 메노르카라는 지역의 역사와 건축물이 품은 오랜 시간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완벽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마르티는 지하, 1, 2, 다락방까지 총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구조를 8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로 재설계했다. 건물 출입구로 이용하는 정면 외벽의 모습은 유지하되 커다란 이중 창문을 만들어 넓은 시야를 확보했다.



8개의 객실에는 오래된 나무 들보와 장식 요소를 보존하기 위해서 주재료로 목재를 선택했다. 외부 창문에는 소나무를, 문이나 벽 등에는 현대적 미감을 더할 수 있는 세 겹으로 된 전나무 패널을 사용했다. 건물이 들어선 부지는 삼각형에 가까운 독특한 형태라 건물의 가장 긴 벽에 인접한 방은 직사각형이고, 짧은 변에 인접한 방들은 사다리꼴인 까다로운 환경에서 객실 평면도를 재치 있게 구획한 건축가의 지혜가 돋보인다.








마르티는 내부에 가구를 들일 때도 심혈을 기울였다. 메노르카 마오 지역의 대표적인 골동품 상인인 알콜레아Alcolea, 크라우스Kraus 등과 협업해 공간의 역사와 어우러질 수 있는 가구를 골랐다. 또한 유럽의 빈티지 디자인 가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손님들이 예술과 디자인이 깃든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몇 가지 인테리어를 소개하자면 가장 먼저 천장으로부터 자연광이 내리쬐는 계단이다. 기존 모자이크 형식의 대리석 바닥의 오렌지색과 파란색에서 모티브를 얻어 베르너 아이슬링거의 아스펜Aspen S17 조명을 중앙에 달았다. 알록달록한 색감은 공간에 유쾌한 리듬을 전한다.



1층 출입구 근처의 거실은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으로 기능한다. 오래된 건물의 기둥 아래 세스카 체어Cesca Chair, 무토Muuto의 커넥트 소파, M69 램프 등 현대적 가구와 조명을 대조적으로 배치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 호텔만의 미학을 만들어냈다. 지하에는 투숙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식사 공간을 만들었다. 지역 특성상 지하에 동굴 같은 공간을 설계한 건물이 많은데 마르티는 아치형 천장에 조명을 설치해 특색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부티크 호텔이란 객실 수 100개 이하의 소규모 호텔로 소수의 고객에게 섬세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건축이나 디자인적으로 개성이 뚜렷한 호텔을 말한다. 부티크 호텔의 역사는 1981년 런던의 블레이크스 호텔, 샌프란시스코의 베드포드 호텔 등에서 시작한다. 특히 블레이크스 호텔은 디자이너 아누스카 헴펠Anouska Hempel이 맡았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타운하우스 건물 외관은 보존하면서 동서양의 클래식한 디자인을 인테리어에 적용해 리모델링한 것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이곳저곳에서 부티크 호텔의 정의를 모호하게 만드는 공간이 생기는 요즘, 호텔 에브레삭은 스페인 메노르카의 역사와 건축, 현대의 미감을 건축가의 언어로 잘 풀어낸 모범적 사례가 아닐까? 호텔 에브레삭에서는 수 세기 동안의 시간이 공간에 살아 있다고 느끼도록 건축자재와 가구, 오브제를 섬세하게 큐레이션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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