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세상의 소음을 잊기 위해 마신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콩세르바투아르 데제미스페르 창립자 알리스 뷔로는 “차는 세상의 모든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마신다”고 말한다. 스리랑카 여행 중 마주한 차 한잔에 사로잡혀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차를 탐험한 그녀는, 와인이나 향수처럼 짙고도 섬세한 아로마를 지닌 블렌딩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시아 지역의 차 문화와 프랑스 특유의 우아함이 깃든 차 문화를 결합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을 열었다.
콩세르바투아르 데제미스페르 대표 알리스 뷔로 / Photo Alexia Maggioni
햇살이 가득 스며드는 창가 아래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듯 정갈하게 놓인 앤티크 세라믹 찻잔과 티포트, 달콤한 마카롱이 손짓하는 티타임. 하지만 파리 7구 혹은 16구의 찻집 콩세르바투아르 데제미스페르Conservatoire des Hémisphères에 발을 들이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오크 목재 대형 선반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바닥은 흑백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마치 책과 기록물로 가득한 도서관이나 신비로운 박물관에 들어선 듯한 이 공간이 찻집임을 알려주는 순간은 서랍장을 여는 찰나다. 차의 맛과 향, 색상, 테루아, 질감 등에 따라 세심하게 분류된 서랍장을 하나씩 열 때마다 황홀한 향이 감돌며, 각 서랍 속에 담긴 찻잎이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와 기억을 일깨운다.
패션과 뷰티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독창적인 경력을 쌓아온 알리스 뷔로Alice Bureau는 스리랑카 여행 중 구름에 닿을 듯한 계단식 차밭을 마주한다. 그곳에서는 시간마저 느릿하게 흐르는 듯, 차가 재배되고 건조, 롤링, 산화되는 과정 하나하나에 고유의 리듬이 있었다. 찻잎 사이에서 손끝에 닿는 미묘한 감촉, 차 생산자들의 깊은 대화 속에서 와인이나 향수에 견줄 만한, 프랑스 스타일의 독창적인 차를 떠올린 그녀는 찻잎을 따라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감각의 차를 만들고자 했다. 그로부터 2년간 농장을 다니며 차와 생화, 향신료, 과일을 혼합해 독창적인 향수 같은 차의 컬렉션을 완성해갔다. 그 여정의 결실로, 2021년 파리 뤼 뒤 바크Rue du Bac 96번지에 그녀의 첫 찻집을 열고 최근 두 번째 찻집을 오픈했다.
Photo Alexia Maggi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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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차 문화는 와인이나 향수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만의 차 문화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아시아의 차 문화는 의식과 의례의 일부로 자리 잡았지만 프랑스에서는 미식 경험의 한 요소로 여깁니다. 차 자체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음식과 차를 마시는 공간과 대화 분위기까지 함께 즐기는 것이 프랑스 차 문화의 특징이죠. 흥미롭게도 프랑스에 차가 처음 전해진 것은 1636년으로, 이는 영국보다도 앞선 시기예요. 당시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더불어 유럽에서 차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 중 하나였으며, 와인의 나라답게 차 생산지와 테루아에 주의를 기울이며 섬세한 맛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차에 자연의 향을 더해 새로운 맛과 향을 창조하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이는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닌, 향수처럼 다양한 향미로 즐기는 프랑스만의 독창적 접근 방식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향을 첨가한 차를 테 파르퓌메thé parfumé라고 부르며 차에 장미, 재스민, 라벤더, 베르가모트 등 다양한 꽃과 과일, 허브 등을 혼합해 특별한 향을 더하는 것이 일반적이고요.
그럼 이 장소를 통해 전하고 싶은 차 문화는 무엇인가요?
프랑스어 ‘콩세르바투아르conservatoire’는 주로 예술이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기관을 말합니다. 또 ‘에미스페르hémisphères’는 지리적 관점에서 ‘동양과 서양’ 또는 ‘남반구와 북반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찻집은 단순히 차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과 문화 속 차와 관련한 스토리를 담아 낸 아카이브라 할 수 있어요. 차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 아시아를 떠올리지만 사실 차는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곳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숨겨진 장소와 전통을 조명하고자 했고, 유명한 빈티지 차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차를 손님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어요.
컬렉션은 어떻게 구성했나요?
전 세계의 다양한 농장을 찾아가 독창적인 차를 발견하는 여정에서 시작했죠. 콜롬비아, 스리랑카, 말라위 등에서 작고 윤리적인 생산 방식을 고수하는 농장들을 찾아내 특별한 맛을 지닌 차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2년간의 연구 끝에 45종의 차로 컬렉션을 완성했어요. 종류가 너무 많으면 손님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정도의 차를 추천하며 향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드리고 있어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곳의 최고 가치는 손님이 차 한잔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단순히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차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벽에 설치된 차향이 나는 장치는 어릴 적 어머니의 차 캔을 열어보던 기억을 반영한 것입니다. 수백 개의 서랍을 여닫으면서 차를 보고, 듣고, 만지며 차와 함께하는 감각적인 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했어요. 오래된 차 도구로 차를 우려내는 과정, 손님이 선택한 색상의 벨벳 리본으로 포장하는 작은 과정 하나하나가 마치 예술 공연처럼 손님들에게 차를 즐기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앤티크 유물처럼 보이는 차 도구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판매도 하나요?
차와 마찬가지로 저희는 차 도구도 엄격한 기준을 두고 선택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차를 잎차 형태로 즐기는 전통이 있어 세심한 여과기는 필수입니다. 오래된 금속공예 기술로 만든 작은 필터 바구니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죠. 또한 인도 보리수(Bodhi) 잎으로 만든 필터는 찻잎을 위에 띄운 채 찻물만 잔에 따라내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번 봄에 출시할 구리로 만든 뱀 모양 필터는 제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차 한잔 마시는 행위를 예술 작품처럼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손님들이 이러한 도구를 이용해 차를 더욱 독특하게 즐길 수 있도록 일부는 판매도 하고 있어요.
상자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의도가 담겨 있나요?
귀한 재료를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걸맞은 품격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 신비한 유물처럼 보였던 ‘마녀의 눈 거울(oeil de sorcière)’에서 영감을 받아 상자와 서랍 디자인을 구상했어요. 상자는 차의 신선함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그 선택 또한 신중해야 합니다. 매일 차를 마신다는 것을 전제로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일상 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는 느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Photo Alexia Maggioni
Photo Alexia Maggioni
일본산 녹차에 말린 대추와 딸기, 장미 꽃잎을 조합한 리브 고슈Rive Gauche
차와 와인은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보나요? 차가 와인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차와 와인은 향미의 풍부한 조화로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습니다. 그 둘의 공통된 용어와 섬세함은 참으로 흥미롭죠. 특히 중국 윈난성의 특산품 보이차는 녹차나 홍차와 달리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숙성 과정을 거치며, 맛과 향이 점차 변하는 이 특별한 차는 ‘차의 포도주’라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차는 와인과 달리 찻잎을 직접 보고, 만지고,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동반자 같은 느낌이 더 강하죠.
차의 품질과 디자인은 평가할 수 있지만, 이를 보장하는 공식적인 기준이나 인증은 많지 않죠. 고품질의 윤리적인 출처에서 나온 차를 제공할 때, 그 품질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에코서트Ecocert 인증을 통해 유기농 차와 고품질을 보장하고 있으며, 이는 손님들이 안심하고 차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래도록 관계를 맺어온 플랜테이션과 협력해 차의 품질과 전통을 지켜가고 있으며, 차를 고르는 것에 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했죠. 이를 통해 세계 최고의 찻잎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만큼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큽니다. 저에게 좋은 차는 감동을 주는 차입니다. 손님이 차를 통해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장인의 손길이 닿은 그 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차를 전하고 싶어요. 품질이 좋을수록 기억이 선명하죠.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것이 블렌딩 향차라고 들었습니다. 직접 향차를 제조했다고 하는데,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향수 브랜드에서 일하며 향과 조합에 대한 감각을 익혔고, 이 경험이 차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차를 마치 향수와 요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고, 클래식한 차에 진짜 과일과 향신료, 천연 향을 조합해 색다른 향미를 더하죠. 예를 들어 딸기 차를 만들 때는 실제 딸기를 사용해 자연스러운 향을 입힙니다. 물론 모든 조합이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재 약 60종의 향차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의 소소한 순간,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서 영감을 얻어 차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우롱차와 설탕에 절인 밤을 조합한 레시피나, 애플파이의 향을 담은 차, 구운 아몬드 향이 나는 차 등은 그러한 영감의 산물이죠.
과정이 무척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었던 제품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만든 차 리브 고슈Rive Gauche는 일본산 녹차(Sencha)에 말린 대추와 딸기, 장미 꽃잎을 조합한 매혹적인 향이 기억에 남아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뱅 데 님프Bain des Nymphes였습니다. 코코넛 향은 매우 강해 다루기 쉽지 않았지만 건포도를 섞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어냈죠.
“찻집의 선반을 채운
모든 물건이 저의
보존물이자 추억의
조각들이에요.
지금의 시간을 잊고
차와 함께 기억 속 여행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죠.”
당신의 차를 가장 매혹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함께 차 한잔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이야말로 차가 주는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는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이어주며, 사람들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매개체입니다. 물론 혼자 차를 즐기며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차는 함께할 때 더 의미가 깊죠. 차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 도구라 할 수 있어요.
콩세르바투아르라는 이름처럼, 보존하고 싶은 물건이나 추억이 있나요?
저도 부모님처럼 대단한 수집가입니다. 찻집의 선반을 채운 모든 물건이 저의 보존물이자 추억의 조각들이에요. 세계를 여행하며 찾아낸 소중한 보물들로, 각 물건마다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이 보물들은 공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며, 손님들이 이곳에서 지금의 시간을 잊고 차와 함께 기억 속 여행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죠.
“차는 세상의 소음을 잊기 위해 마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차는 무엇인가요?
정말 아름다운 표현이네요. 저는 여기에 더해 ‘차는 세상의 소음과 더불어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마신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차는 나눔과 전통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삶의 작은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그 순간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차 한잔을 마시며 그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경험은 차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죠.
Text | Anna Gye
Photos | Conservatoire des Hémisphères(hemispherespar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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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