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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도시, 라이프스타일

거주자가 완성하는 건축

아홉 칸 집 외

Text | Mike Choi

오랜 기간 건축가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집’을 제공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오늘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주거 형태는 그들의 노력과 헌신의 결과다.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많은 건축가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모두’에게 좋은 집을 선사할 수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홉 칸 집 Concrete Model, 2018 / ⓒ 네임리스건축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이 프로젝트로 2016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심사위원단은 ‘아라베나는 사회 참여적 건축 운동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평했다.”



수많은 연구와 세심한 결과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채운다 한들 각양각색인 사람들의 취향과 필요를 모두 만족시킬 순 없다. 단순하고 한편으로 조금은 뻔하기도 한 이 사실을 인정한 몇몇 현명한 건축가들은 이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공간의 ‘A to Z’를 건축가의 손으로 완성하기보다 의도적으로 빈틈을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여백을 사용자들이 채워주길 바라며.

<빌리브> 매거진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칠레의 공공 주택 ‘킨타 몬로이 Quinta Monroy’는 바로 이 빈틈으로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Alejandro Aravena는 이 프로젝트로 2016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심사위원단은 “아라베나는 사회 참여적 건축 운동의 부활을 상징한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선량한 건축가의 착한 결과물로만 한정 짓는 것은 무리다. 킨타 몬로이의 성공 배경에는 똑똑한 여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칠레의 공공 주택 ‘킨타 몬로이’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칠레는 아라베나와 공공 건축을 시작하기 이전인 1990년대에 한 차례 초대형 공공 주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정부는 빈민들에게 중산층형 주택을 보급해 슬럼가를 없앤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1만 1000달러의 예산을 들여 고급 마감재와 보일러 시설까지 갖춘 번듯한 주택을 마련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반대로 결과는 참담했다. 예산을 맞추기 위해 도심 외곽에 부지를 선정한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빈민 대다수가 도시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집에서 일터가 멀어지자 출퇴근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일자리를 잃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빈민들은 주택을 헐값에 내놓고 또다시 도심으로 이주해버렸으며 슬럼가를 없애기 위해 지은 공공 주택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슬럼가가 돼버렸다.

실패로 끝날 것 같던 칠레의 공공 주택 프로젝트는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를 만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이전 공공 주택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새로운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접근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반쪽짜리 좋은 집’이다. 이번에는 거주자의 근무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부지를 선택한 대신 집은 말 그대로 ‘절반만’ 지었다. 보일러는 물론 건물의 마감까지 생략했고 전기 및 수도 시설, 욕조 등 최소한의 요소만 갖추었다. 부지 선정에 너무 많은 돈을 들인 나머지 예산이 초과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라베나는 거주자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아홉 칸 집 내부. 마감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거친 느낌이지만 천편일률적인 주거 형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 ©노경


<아홉 개의 방, 미완의 집> 전시. 네임리스건축과 에이리 가족의 고경애 작가 그리고 건축 사진을 찍은 노경 작가가 함께했다.




“빈틈을 추억과 이야기로 켜켜이 채워 넣는 것은 어느 천재 건축가의 재능이 아닌 그곳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평범한 거주자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됐다.”




킨타 몬로이만큼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국내에서도 감성적 이야기와 가능성으로 공간을 채워나간 사례가 있다. 설계 사무소 네임리스건축이 경기도 광주 노곡리에 건축주인 에이리 가족을 위해 지은 ‘아홉 칸 집’이다. 정사각형의 방 9개로 이뤄진 이 집은 방의 용도가 따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기능적이고 밀도 높은 평면은 이미 틀에 박혀 있어 변화의 여지가 없다. (중략) 우리는 이 기능적이고 익숙한 공간을 깊이 의심하고 있다”(<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 중)라는 네임리스건축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들은 모든 공간의 크기와 위계를 균질하게 맞췄다. 또한 각 방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이 집에 실제로 거주할 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다소 엉뚱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실험이지만 에이리 가족은 이 집을 기꺼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네임리스건축과 에이리 가족은 아홉 칸 집을 짓기 위해 나눈 대화와 준공 이후 가족이 그곳을 채워가는 생활상을 ‘이어 쓰기’ 형식으로 담은 책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를 출간했다. 또 지난 7월 통의동 온그라운드에서는 그동안의 여정을 담은 전시 <아홉 개의 방, 미완의 집>을 열기도 했다. 조금은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더라도 건축주와 건축가 모두 이야기와 삶으로 여백을 메워나갈 수 있는 집을 선택한 셈이다.

킨타 몬로이와 아홉 칸 집은 얼핏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지은 두 집 모두 건축가들이 ‘전지적 건축가 시점’을 버리고 공간 디자인의 열쇠를 거주자에게 넘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일상은 다채롭다. 제아무리 천부적인 건축가라고 한들 그 변화무쌍한 인생을 재단할 재간도 권한도 없다. 이것이 오늘날 여백, 여지, 미완의 집이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이유다. 빈틈을 추억과 이야기로 켜켜이 채워 넣는 것은 어느 천재 건축가의 재능이 아닌 그곳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평범한 거주자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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