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은신처를 찾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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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라이프스타일, 노마드, 힙스터

나만의 은신처를 찾는다면

남자의 동굴, 케렌시아

Text | Bora Kang
Photography | Jasper White

“30평도 넘는 집에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매거진이 인터뷰한 김윤관 목수의 말이다. 듣고 보니 그렇다. 수십억에 달하는 아파트에 사는 가족이라 해도 구성원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안방은 침실로, 작은 방은 자녀의 공부방 아니면 옷방으로 쓰는 게 보통이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커지면서 집 밖 어딘가에 나만의 공간을 꾸리는 것이 일종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유행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4인 가족 중심의 집 구조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그런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엄마들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는 한편, 다락방이나 지하실을 오디오 룸이나 게임 룸으로 개조한 아빠들의 사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각 개인에게 독립된 사무 공간을 제공하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나만의 아지트로 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독일어로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친 슈필라움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뜻한다. 여기서 공간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나만의 공간을 찾고 나만의 공간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을 ‘슈필라움 Spielraum’이라고 정의한다. 독일어로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친 슈필라움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뜻한다. 여기서 공간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한다.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고,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피하기 위한 나만의 방. 그가 가진 돈을 그러모아 여수 남쪽 섬의 쓰러져가는 미역 창고를 작업실로 꾸민 이유다.

김정운 교수는 자신의 저서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슈필라움’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다는 것은 그러한 공간이 아예 없거나 그러한 공간의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여유 공간인 슈필라움을 가질 것을 권한다. 그는 특히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타인의 감시에서 벗어난 자연인의 삶을 꿈꾸는 한국 남성들의 심리에 주목한다. 슈필라움이야말로 그들이 삶과 사회를 주체적으로 조망하고 행복의 지평을 자율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이다.




Ian's Shed, © Jasper White


kent's Shed, © Jasper White


flaherty's Shed, © Jasper White




독일에 슈필라움이 있다면 오스트레일리아 남자들에게는 ‘창고 sheds’가 있다. 이들에게 창고는 집도 일터도 아닌 제3의 공간이자 성인 남자의 공인된 놀이터다. 영국 출신 사진작가 재스퍼 화이트 Jasper White가 기록한 창고 시리즈는 집에 딸린 창고를 오락실처럼 개조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남자들의 독특한 문화를 조명한다. 이 프로젝트는 새해를 하루 앞둔 어느 날, 재스퍼 화이트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여동생 집에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늦은 저녁 술 한잔할 생각에 밖으로 나온 그는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을 알고 실망했다. 그러다 가까스로 찾은 술집에서 주민들과의 대화 끝에, 동네 사람 대부분이 술집이 아닌 자신의 ‘창고’에서 저마다 파티를 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 빅토리아 서부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의 남자들은 다들 자기만의 은신처를 가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창고’는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퍼져 있는 문화였다. 재스퍼 화이트는 이것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여동생의 친구와 가족,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촬영지를 물색했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소문이 빨리 퍼졌고, 촬영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한 사람이 창고를 내주고 나서 자신이 아는 또 다른 사람의 창고를 추천해주는 식이었다. 창고 주인들은 그에게 ‘꼭 봐야 할’ 창고를 앞다퉈 추천해주기도 했다. 요컨대 그가 만난 사람들은 촬영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자들은 창고 문화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이사할 때조차 집보다 창고를 먼저 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자들은 집 안에 두기 어려운 물건을 창고로 옮겨 자기만의 동굴을 만들고, 서로의 동굴을 드나들며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맥주를 마시고, 스포츠를 논하고, 새 차를 자랑하며 ‘남자다운’ 우정을 쌓는다. 동굴을 꾸미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거대한 당구대를 설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맥주 냉장고에 바 체어까지 갖춘 애주가도 있다. 본래 차, 장비, 부품 등을 보관하는 장소였던 창고가 소유주의 취향과 삶을 반영한 슈필라움으로 거듭난 사례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혼자 조용히 찾아가 치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자신만의 안식처를 뜻하는 케렌시아 querencia. 스페인에서 온 이 말은 본래 투우 경기에 참가한 소가 잠시 숨을 고르며 기력을 회복하는 장소를 뜻한다.”




혜민 스님은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에서 ‘슈필라움’에 조응하는 낯선 단어 하나를 꺼낸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혼자 조용히 찾아가 치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자신만의 안식처를 뜻하는 ‘케렌시아 querencia’가 그것이다. 스페인에서 온 이 말은 본래 투우 경기에 참가한 소가 잠시 숨을 고르며 기력을 회복하는 장소를 뜻한다. 혜민 스님은 케렌시아의 존재는 명확하고 구체적일수록 좋다며, 불안하고 힘든 삶을 버티기 위해서는 주변에 케렌시아를 여러 곳 마련해둘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뉴욕에서 그의 케렌시아는 자신의 멘토 스님이 기거했던 불광선원이고, 한국에서는 해남 땅끝마을의 미황사와 삼청공원이다. ‘자기만의 방’ 혹은 ‘남자의 동굴’이 반드시 집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때에 따라서는 집 앞의 작은 공원이나 카페, 잡동사니로 가득 찬 창고도 나만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이제 주변으로 눈을 돌려 나만의 슈필라움, 나만의 케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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