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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노마드, 큐레이션

머물지 않고 떠나는 집에 관하여

영화 <집 이야기>

Text | Kakyung Baek
Photos provided by Feel & Plan

'집'이란 단어는 언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깊이를 지닌다. 최근 개봉한 영화 <집 이야기>는 가장 쉬운 집의 의미부터 복잡하고 깊은 뜻까지 간극을 넘나들며 집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다. 제 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첫선을 보인 바 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혼자 서울에 살며 신문사 편집 기자로 일하고 있는 은서다. 그녀는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가지만 도무지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수가 없다. 새집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아버지가 사는 고향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홀로 열쇠 수리 일을 하며 사는 아버지 진철은 평생 남의 집 닫힌 문만 열어왔다. 그는 은서와 지내는 동안 가족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관계에 대한 영화는 많지만,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집과 삶이 영화 한 편에 녹아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시나리오를 맡은 윤상숙 작가는 집을 머물고 정착하는 장소가 아닌 떠나는 곳으로서 바라보았다. 작가는 서울에 살면서 무려 스물네 번 이사를 해야 했던 일과 그동안 떠나온 집, 중간중간 다시 돌아가야 했던 부모님의 집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 속의 은서처럼 집을 찾고 있었다. 집을 찾다 지쳐서 카페에 앉아 내가 살았던 집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번호를 매겨보니 스물네 번 정도 이사를 했더라. 나는 계속 어디론가 떠났구나. 집이라는 곳이 보통 정착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떠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이번 각본을 맡게 되었다.”

- 영화 <집 이야기> 시나리오 작가 윤상숙 -




영화의 시선은 주요 등장인물의 집을 차례로 들여다보며 흘러간다. 집을 바라보는 영화이니만큼 감독은 로케이션에 큰 공을 들였다. 모든 촬영은 세트가 아닌 서울의 오피스텔, 인천의 버려진 집, 제주도의 전원주택 등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영화는 주인공 은서의 집에서 시작한다. 6평 정도 되는 작은 원룸은 이제 곧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은서는 부동산 중개인과 오피스텔과 레지던스를 찾아가 “제가 찾는 집이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은서는 엄마의 연락을 받고 원룸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 어딘지 서먹한 시선만 주고받는 엄마의 집이 두 번째 장소다. 제주 해변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난 화사한 흰색의 전원주택. 은서가 찾아간 그날은 엄마가 새로운 남자와 공식적인 혼인을 하는 날이다. 높다란 대문을 세우지 않고 그저 기다란 나무를 걸쳐놓은 제주도 집의 대문처럼 엄마의 생활은 여유가 넘친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엄마를 은서는 그리 기쁘지 않게 바라본다. 아빠의 안부를 묻는 언니와 엄마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올라온 서울, 곧장 찾아간 곳은 절친 민정의 집이다. 은서는 반지하에서 이사 좀 가라며 민정에게 핀잔을 주지만 민정은 “정 붙이고 살면 거기가 내 집이지”라며 연애나 하라고 받아친다.

민정의 표현처럼 ‘궁상맞게’ 새집을 찾아다니던 은서는 결국 원하는 곳을 정하지 못한 채 당분간 아빠 진철이 혼자 사는 고향 집에 내려가기로 한다. 아빠 혼자서 열쇠 수리점을 운영하며 가족의 흔적을 간직한 채 살고 있는 그 집에서 영화는 절정을 맞는다. 은서는 곧 떠날 거라며 짐조차 풀지 않고 예전의 사진과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 붙어 있는 해변 사진의 달력을 본다. 여전히 그 집에는 창문이 없다. 엄마가 말하길 진철은 아파트를 장만하는 게 꿈이었다. 잠깐 살려고 들어간 그 집에 창문을 내면 거기서 오래 살 것 같아서 만들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고지식하고 예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진철이지만 그는 은서가 온다는 소식에 복숭아 김치를 담그고 새 수건을 사다가 넣어두며 애틋한 마음을 보여준다.









“집이 어디로 가? 거기 그대로 있지.” “그러네. 떠나는 건 사람인데.” 진철의 수술을 앞두고 은서와 진철이 나누는 대화다. 결국 영화 말미에 아빠의 장례를 치르게 된 은서. 그녀는 화장한 아빠를 잠시 모셔둔 곳의 열쇠를 받아 들고 오열하고 만다. 은서는 아버지의 관에 작은 창문을 내주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듯 그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든다. 홀로 진철의 집을 찾은 은서가 언니가 준 라면과 아빠가 담근 복숭아 김치를 먹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녀가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을지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의 ‘집’을 찾은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를 만든 박제범 감독은 작가의 시나리오를 읽고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끌렸다고 한다. “<집 이야기>는 집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꼭 해답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집 이야기>를 보고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 어디에 살고, 누구와 살고, 과거에 이곳에서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집 이야기>가 상영되는 스크린 앞에서 내가 떠나온 집에 대해, 지금 사는 집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한 해를 꽤 괜찮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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