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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다양성, 도시, 코리빙

전생에 우리 분명 뭔가 있었을 것 같아

배우 손수현

Text | Soohyun Sohn
Photos | Jungmin Son

배우 손수현이 집이 이어준 소중한 인연에 대해 말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쇼핑몰을 운영하며 극한의 노동에 허덕였던 3평짜리 오피스텔, 그 인연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절친들이 그 오피스텔에 살면서 마음도 몸도 따뜻한 일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손수현은 그렇게 닿은 인연이 신기하고 소중해서 종종 내뱉는 말이 있다. 전생에 우리 분명 뭔가 있었을 것 같아.




첫 독립을 시작한 오피스텔

내가 사는 동네에는 아파트도 있지만 오피스텔도 많다. 근방에 대학교가 3개나 있어서 그런지 비교적 저렴한 오피스텔도 있다. 저렴하다는 건 무엇보다 상대적이어서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간간이 햇빛은 드니 그래도 어느 ‘중간’에서 살고 있다는 위안은 준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한 오피스텔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화장실과 부엌을 빼고 나면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이불을 접었다 폈다 하며 잠을 잤다.



지금은 노묘가 된 고양이 슈짱과 처음 부대낀 곳, 대학교를 졸업하고 뭐 하면서 먹고살지, 매일 고민하던 곳. 모아둔 돈으로 혼자서 호기롭게 쇼핑몰을 시작했다가 극한의 노동에 허덕였던 곳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새벽에 택시 안에서 맡았던 아카시아꽃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집으로 향하던 길에 갑자기 새어 들어온 꽃향기를 맡고서 펑펑 눈물을 쏟은 적이 있었다. 숨을 양껏 들이마시는 일이 3평 공간에서는 아무래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우렁각시와 함께 살던 빌라

시작도 빠르지만 포기도 빠른 것은 장점일까? 1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서 나는 미치기 전에 냉큼 사업을 접었다. 그러곤 3평 집에서 당장 벗어났다. 그다음 자리 잡은 장소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당시 혼자 살던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된 것이다. 월세를 반반 부담하면서 친구는 내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었지만, 갑자기 몸만 독립했던 나는 집안일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던 엄마라는 존재 덕분에 집 안에 먼지 하나 없던 깨끗함이 당연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집을 치워주는 요정, 그 우렁각시가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독립을 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런 상태의 나와 함께 지냈던 그 친구는 나를 대신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 걸까. 싱크대에 올려둔 컵라면 뚜껑을 나 대신 치워줬을 그 친구를 종종 떠올리며 월세를 다 내고도 모자를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1년을 살았다. 그 뒤로 그 친구와 근처 다른 집에서 1년을 살았고, 데뷔하고 난 뒤에는 그 친구로부터도 완전한 독립을 했다. 서교동 한 빌라에서 또 1년을, 본가로 다시 들어가서 1년을, 다시 또 연희동으로 돌아와 1년을, 화곡동으로 넘어가서 1년을 지내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 언덕에 자리한 연희동 빌라에 안착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여섯 번째 가을이다.




그렇게 닿은 인연이 신기하고 소중해서 뱉어지는 말이 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

그렇게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복층 오피스텔은 점점 기억에서 흐려졌다. 오며 가며 오피스텔을 지나칠 때도 있었지만 이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집이었다. 친구 S Y가 뜬금없이 그 오피스텔에 들어앉기 전까지는. 나와 S 2017년 무렵 그의 공연장에서 처음 만나 술을 매개로 끈덕진 친구가 됐다. S를 처음 알게 됐을 당시 그는 본가에 살고 있었다. S를 통해 P Y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마침 우리는 그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있던 참이었다. 마라톤의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그 소리에 맞춰 동시에 달리기를 시작하는 마라토너처럼 그 출발이 같지는 않았어도 각자의 귀를 멍하게 만들던 총소리가 있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막 달리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일찍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세상의 흠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벽에 뚫린 못 구멍 하나라도 막고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술을 많이도 마셨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는 속담에 해가 진짜 서쪽에서 뜬다고 헷갈릴 만치 해롱대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각자 집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 아쉬워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 아쉬움이 동력이 되어 잘 움직이지 않는 S를 움직이게 했다. S는 그 길로 내가 살던 그 복층 오피스텔을 계약하고 만 것이었다.




마음도 몸도 따뜻한 우리들의 집

계약도 이사도 일사천리로 마친 S의 집을 찾아갔다. 경비 아저씨도 그대로였고 그 밑의 편의점도 그대로였다. 약간 누런 벽지와 작은 부엌도, 계약서상 반려동물 금지라던 오피스텔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까지도 그랬다. 아니, 어떻게 하필 또 이곳이야? 나는 물었고, S는 근처에서 제일 저렴하면서 살 만한 곳이 이곳뿐이었다고 했다. 오피스텔치고 괜찮은 가격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괜찮은 가격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보일러를 풀 가동해도 복층의 땅바닥은 냉골처럼 차가웠고 추우면 복통이 오는 S는 자기 집을 두고 우리 집에 자주 왔다. 따뜻한 바닥을 좋아하는 고양이들 덕분에 우리 집은 늘 바닥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보니 S는 어느 순간 우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 값비싼 땅값에 월세는 반반 내는 게 제일이니까.



S의 복층 집에는 Y가 들어왔다.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Y가 본가를 떠나오는 데는 하루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집 비었는데 네가 살면 어때? 이렇게 운을 뗀 다음 날 캐리어 가방 하나 들고서 Y는 출가를 했다. 곪은 뾰루지 튀어나오듯 그렇게 본가를 뛰쳐나와 복층 원룸을 예쁘게도 꾸며두었다. 이제는 한 동네에 걔 집도 있고 내 집도 있어서 아무리 술을 먹어도 막차 시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Y P와 함께 살게 된 것은 그 오피스텔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난 뒤였으니 P는 한동안 우리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길을 출퇴근했다. 유일하게 기업에 다닌 전적이 있는 P는 출퇴근이 꽤 익숙해 보였지만 기회를 잡아 그만둔 것을 보니 그건 아무리 익숙해져도 싫은 일임이 분명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살던 둘은 또 기회를 보다가 나와 S가 살던 집 아래층으로 이사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게 좋은 법이다. 회사도 마음도 몸도 뭐든.




어떤 학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인연에 대하여

그렇게 우리는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 과정에는 흩어져 살던 각자의 삶이 있었다. P는 본가의 방에서 혼자 몰래 술을 마셨다고 했다. S는 여기저기 떠돌며 혼자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Y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셨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기분으로 다른 술을 마셔왔는데 지금은 함께 마신다. 물론 지금도 각자의 삶이 있다. 그러다 다시 만난다. 그럴 때면 종종 모두가 잠깐 스쳤던 오피스텔을 떠올린다. 내가 10년 전 그 오피스텔에서 컵라면 봉지 하나 치우지 않으며 살 때만 해도 그곳에 이들이 들를 줄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P가 술에 잔뜩 취해 그곳에서 한숨 자고 갈 것이란 사실도.



인연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는가. 어떤 학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에는 종교나 미신이 붙기 마련이다. 그 둘은 어쩌면 한 끗 차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임시 보호차 잠시 들른 강아지나 고양이를 볼 때, 마음이 딱 맞는 사람을 만날 때, 그렇게 닿은 인연이 신기하고 소중해서 뱉어지는 말이 있다. 전생에 우리 분명 뭔가 있었을 것 같아.




손수현 |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하며 종종 글도 쓴다. 그가 배우로 참여한 영화로는 <오피스> <마더 인 로>가 있으며 단편영화 <프리랜서> <선풍기를 고치는 방법>을 연출했다. 최근에는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공저)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라는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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