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막혀 자신을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공간은 고양이뿐 아니라 사람도 좋아한다. 내가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는 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오래 전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집을 만들었다. 그렇게 자연이라는 공포를 방어하고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안전을 느낀다. 그런 집을 사람들은 흔히 ‘아늑하다’고 표현한다.
©HMMB
나와 아내의 침대는 오후가 되면 우리 집 고양이의 침대가 된다. 요즘 우리 집 고양이는 오전에 밥을 먹고 일광욕을 하고 그루밍을 하고 약간의 놀이를 한 뒤 또 밥을 먹으면 오전 일과가 끝난다. 조용하다 싶어서 찾으면 아내와 내가 빠져나간 침대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캣폴 꼭대기 자신만의 높은 잠자리도 있고, 숨숨집도 여러 개 있는데 굳이 사람 침대 이불 속에서 잠을 잔다. 겨울이라 추워서 그런가 싶기도 하겠지만, 여름에도 낮에는 반드시 침대 이불 속에서 잠을 잔다. 어쩌다 우리 침대 이불 속에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는 거실 카펫 밑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잔다. 왜 그럴까? 이불이나 카펫 속은 자신을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불이나 카펫은 직물이라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준다. 그 안은 엄마의 자궁 속만큼이나 안전하다. 고양이는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곳을 가장 좋아한다.
사방이 막혀 자신을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공간은 고양이뿐 아니라 사람도 좋아한다. 내가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는 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문명화된 도시에서 살고 있어 자신을 외부로 노출시키는 것을 전혀 위험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초기 인류에게 외부, 즉 자연이란 공포의 연속이었다. 언제든 나보다 크고 힘이 센 맹수가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 폭풍과 눈과 비, 무더위도 나를 성가시게 하고 무섭게 만드는 요소다. 이 모든 것이 나약한 인간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런 자연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집을 만들었다. 울타리를 만들어 맹수나 차갑고 더운 기운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지붕을 덮어 눈과 비를 막았다. 그렇게 자연이라는 공포를 방어하고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안전을 느낀다. 그런 집을 사람들은 흔히 ‘아늑하다’고 표현한다.
아늑함은 공간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한다. 천장고가 너무 높거나 방이 너무 크면 아늑함을 사라지고 이내 불안해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작은 집에서 살지만 금력과 권력이 생기면 집이 커지기 마련이다. 집이 커지는 이유는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물건은 물론 하인들까지 소유한 부자들은 집을 더 넓고 높게 만들어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집이 커지면 대가를 치르는데, 바로 아늑함을 잃는 것이다. 이 아늑함을 만들어줄 공간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공간이 다락방과 알코브alcove다. 다락방은 주로 아이들이 좋아한다. 성인들은 넓은 거실이나 방에 더 작은 공간을 만드는데, 이 골방 같은 공간이 알코브다. 서양 회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알코브는 마치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장롱 같다. 알코브 안에는 침대를 놓는데 침대만으로 공간이 꽉 찬다. 침대에서부터 알코브 천장까지의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입구에는 커튼이 달려 있어 커튼을 내리면 완벽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방이나 거실보다 훨씬 더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
엄마 뒤편에 알코브 공간이 있다. / 피터르 더 호흐, 1658~1960
아이가 수납장처럼 생긴 알코브 안에서 잠들어 있다. / 야콥 브렐, 1660
집을 만들고 그보다 더 아늑한 공간인 알코브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집 안에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첨단 미디어가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가 없던 시절 사람들이 집 안에서 즐기던 것 중 하나는 밖을, 즉 자연을 관조하는 것이었다. 자연에서는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새가 날아다닌다. 그런 자연을 밖에서도 볼 수 있지만 밖에서 보는 자연은 위험하기도 하다. 반면에 집 안에서, 다시 말해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볼 때 자연은 안전한 감상거리가 된다. 유튜브에서 열차 침대칸에서 창문 밖 설경을 보여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그 공간에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열차 안은 따뜻하고 언제든 침대 위에 앉아 향기로운 커피나 달콤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그런 안전한 공간에서 커다란 창문 밖의 경이로운 설경을 본다는 건 상상만 해도 즐겁다. 열차는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풍경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HMMB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자 주인공이 마치 서양 주택의 알코브 같은 장롱 속에서 잠을 자고 책을 본다. 밖이 두려운 그에게 장롱 안은 가장 안전한 장소다.
이것이 집의 본질이다. 벽과 지붕으로 자연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을 만들되, 벽에 구멍을 뚫어 시선은 차단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창밖의 변화를 보는 것이 커다란 삶의 기쁨이다. 고양이조차 그런 기쁨을 누리는 것이 틀림없다. 안전과 시각적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것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폭풍 같은 무서운 것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숨바꼭질 놀이의 본질은 안전과 공포라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라고 술래가 말하는 동안 아이들은 장롱 안 같은 곳을 찾아 숨는다. 이때 아이는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하나는 공포이고 하나는 안전이다. 술래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그 장소가 주는 안전함이 있고, 또 들킬 수도 있다는 공포도 있다.
언젠가 거리를 걷는데, 앞에서 아이를 안고 가는 아빠가 있었다. 아이는 아빠의 가슴에 안겨 있고 시선은 아빠의 등 쪽을 향해 나를 보고 있다. 이 아이 역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하나는 낯선 성인 남자, 즉 나를 보는 데에서 오는 공포다. 하지만 몸이 아빠의 가슴에 밀착해 안겨 있어서 안전하다고 믿는다. 아이는 나를 보면서 더욱 강하게 아빠의 목을 감싼다. 그러고는 내 시선을 피해 잠시 아빠 어깨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낯선 성인 남자를 보는 데에서 오는 공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집은 안전하고 밖은 위험하지만 집에 있으므로 밖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무서운 변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는 다리를 쓰지 못해 평생 방에 갇혀 사는 젊은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아주 작은 집 안에서 더 작은 장롱 속에서 잠을 자고 책만 보며 살아간다. 그는 한 남자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호랑이가 으르렁거리자 여자는 남자 친구 손을 꼭 잡는다. 이 행동 역시 아빠 품에 안겨 낯선 성인 남자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안전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평생 집 안에서만 살던 장애 여인은 남자 친구라는 안전을 확보하자 비로소 공포가 도사리는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집은 안전하고 밖은 위험하지만 집에 있으므로 밖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무서운 변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언제든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고독을 즐길 수 있다. 외로움이 숙명적인 사람에게는 고독이 결코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숙명적인 외로움은 고통일 뿐이다. 그런 것처럼 내가 안전한 상태, 즉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는 곳에 있다면 어떠한 공포도 즐길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오히려 좋아한다. 스릴러, 호러 같은 장르의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런 공포와 불안정이 일시적이고, 실존적인 나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전하고, 내 앞에서 재현되는 영상만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대립되는 두 가지 현상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느낀다. 숙명적인, 즉 피할 수 없는 안전은 지루하다. 피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내가 안전하다고 믿는 한 시각적인 공포와 불안은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집이란 결국 사람에게 마땅히 느껴야 할 자연의 공포를 감상의 대상으로, 즉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곳이 아닐까? 현대에는 첨단 미디어의 발달로 창밖의 자연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공포를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Text | Shin Kim
2533
969
SNS 상 일본인들의 집에 대한 코멘트
205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김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