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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라이프스타일, 프리미엄

이사의 쓸모

이사 날 풍경

11년 만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란 무척 성가시고 번거로운 일이다. 단순히 몸만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간다면 얼마나 간편한가. 하지만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도 빠짐없이 옮겨야 한다. TV와 냉장고, 식탁과 의자, 책장과 책상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크고 작은 수납장과 책장, 그리고 서랍 속에 있는 물건을 옮기는 일이다.




내용을 연상하게 할 가상 이미지



이사할 때 가구의 무게를 줄이려면 수납공간 속 물건을 꺼내야 한다. 작은 서랍이야 물건을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옮긴다. 하지만 주방 가구 속의 각종 요리 도구와 식기, 붙박이장 속의 침구와 옷가지, 그리고 책장의 책이 모두 쏟아져 나오면 갑자기 집 안은 포장재로 싼 그런 물건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이때 집이란거대한 수납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 안의 부품을 모두 꺼내 자동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이때 부품이 차지하는 면적이 자동차보다 훨씬 더 넓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 몸속의 장기를 전부 끄집어내 펼쳐놓으려면 사람 몸보다 더 많은 면적이 필요할 것이다. 소장과 대장의 길이만 해도 8m가 넘는다. 그런 각종 기관이 몸속에 빈틈없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해 기능함으로써 사람이 생존할 수 있다. 집도 마찬가지다. 지금 주방 가구의 수납장을 한번 열어보라. 각종 요리 도구와 식기가 주방 이용자가 쉽게 찾아 꺼내서 사용하고, 또 쉽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질서 있게, 그리고 밀도 높게 채워져 있다. 책장의 책은 더욱 밀도 높게, 거의 빈틈없이 꽂혀 있다. 이러한 구성은 수많은 물건을 작은 공간에 쌓아둠으로써 집 안 공간의 낭비를 줄이고, 집주인이 각각의 물건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있도록 한 것이다. 집이란 쓸모 있는 물건들이 조밀하게, 그리고 질서정연하게 채워진 공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가 이사업체 직원들에 의해 불과 몇 시간 만에 해체되면 무질서가 찾아온다. 요즘 포장 이사업체에서는 이런 물건들을 다시 원래대로 정리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사한 집의 도배를 다시 해야 해서 모든 짐을 거실과 방 중앙에 쌓아놓은 채 이사 대행이 끝나고 말았다. 도배 공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정리를 시작하는데, 나는 이때 거실에 흩어진 책과 각종 물건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무질서한 상태에서 물건들이 갑자기 빛을 잃었다는 것이다. 식기든 책이든 같은 범주끼리 적당한 공간에 놓일 때 비로소 그것들은 쓸모가 커지기 마련이다. 물건들이 조직적으로 통일감 있게 정리된 상태에서 벗어나 각각의 물건이 떨어져 나가고 흩어지면 갑자기 그 물건의 결함까지 느껴진다. 분리된 물건들은 왠지 낡고 더러워 보인다. 이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 모두) 내용을 연상하게 할 가상 이미지



책이 많은 나는 늘 연말에 연례행사처럼 책의 살생부를 쓴다. 아내가 제발 책을 줄이라고 압박을 가하고, 또 책을 꽂을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생부를 써서 매년 수십 권의 책을 버렸다. 이번 이사에는 수십 권이 아니라 수백 권을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대담한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마치 줄이 끊어져 낱알로 흩어진 목걸이의 구슬처럼 흩어진 책들 역시 빛이 바래 보였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낱개로 흩어진 상태로는 물건들 역시 힘이 생기지 않을뿐더러 가치도 낮아 보인다. 나 같은 저장 강박이 있는 사람조차 책을 버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저장 강박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아내는 이미 많은 물건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예전 같으면 왜 아깝게 멀쩡한 물건을 버리고 돈을 써가며 새 물건을 사려느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 때만큼은 나도 물건 버리기에 관대해진다. 어떤 물건은 중고 사이트에 팔기도 했고, 어떤 물건은 정말 낡아서 버렸다. 냉장고의 경우는 정말 오래 썼고, 마침 이사가 다가오자 냉동실 온도가 더 이상 낮게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고쳐 썼겠지만, 이사를 하려니 버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구청에 신고한 뒤 집 밖에 놓아두었다. 그렇게 버려진 모습이 처량하다. 나는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손으로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한쪽 팔걸이가 부서진 사무용 의자는 그럭저럭 썼지만 이사를 하며 빼내니 역시 버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들, 그리고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두었던 예술 작품조차도 정해진 장소에서 떨어져 나오자 왠지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들은 버릴 수 없다. 가족사진에는 어떤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친숙한 물건들이 채워져 있을 때 비로소 집은 내 기억의 저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물건을 빼내 텅 빈 예전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고 나와 친해진 물건들이 빠져나간 그 집은 같은 공간이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공간이 아니다. 이제 나한테 나가도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11년 살아온 집이 더 이상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약간 서운한 감정이 든다. 나는집은 내 기억의 저장소라고 믿는다. , 그 집 안에 나에게 친숙한 물건들이 채워져 있을 때 비로소 집은 내 기억의 저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사란 사람뿐 아니라 물건을 옮겨 와 내 기억의 저장소를 바꾸는 일이다. 도배가 끝난 뒤 나는 책장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한 뒤 신중하게 책을 카테고리별로 꽂기 시작했다. 아내는 방과 주방의 수납장에 침구와 옷, 그리고 요리 도구와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는데 무질서의 혼돈이 걷히고 질서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책들이 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자 수백 권을 버리려고 했던 의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버리려고 했던 책을 특정 카테고리의 장 속에 넣자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언젠가 볼 거 같은데, 버리면 안 될 거 같아.’ 흩어진 구슬이 다시 꿰어졌고, 잃어버린 새끼를 찾은 암사자처럼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살생부에서 죽음의 리스트에 포함되었던 수백 권의 책이 구원을 받았다. 게다가 이번에 이사 온 집은 저번 집보다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들을 구원해주자. 무엇보다 낱개로 흩어져 있다가 제자리를 찾은 책들은 다시 가치를 회복하고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이사 오고 나서 계속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던 우리 고양이도 이제 안정을 찾았다.


이번 대통령 탄핵 심판 중에 장순욱 변호사가 인용해 유명해진 시인과촌장의 노래 가사를 나도 인용하고 싶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집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들어간 각종 물건은 그전처럼 질서 있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새집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갈 시간이다.



Text | Sh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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