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아주 특별하지만 평범한 곳이다. 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집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가장 기본이 되는 그 장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 노은주, 임형남 건축가 부부의 서문이 인상적인 책 <더 홈>은 건축가, 공예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집 22채를 소개한다. 그 안에서 언젠가 내 집에 깃들면 좋을 이야기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집이 화두가 된 시대다.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고가의 디자인 가구를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SNS 피드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아름다운 인테리어 이미지가 넘쳐난다. 반면 ‘영끌’로 집을 임대했지만 그마저도 전세 사기로 빼앗기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의 청년에게 집은 소유 재산이기보다 월세, 전세를 전전하는 공유 재산에 가깝다.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없다는 불안한 미래를 확신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 양극단으로 치우친 집에 관한 현상 속에서 집의 본질을 묻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집을 구경하고 싶은 욕망은 본능인 것일까. 그것이 시기심을 유발하든 열패감을 불러오든 상관없이 아름다운 집은 그 자체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만큼은 1차원의 멋진 이미지로부터 3차원의 공간이 생겨나 ‘나라면 어떻게 지었을까?’, ‘내 집이었다면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따위의 공상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멋진 공간을 차근차근 꾸려온 집주인의 이야기를 접하다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그가 특정한 공간, 가구를 만든 일화를 알게 되면 ‘언젠가 나도 저렇게 집을 꾸며야지’ 같은 생각의 데이터가 축적된다.
“집에 대해 과거와 현재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일상을 어느 정도 윤택하게 해주는 것 같다.”
최근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부가 펴낸 <더 홈The Home>은 언젠가 가져보길 꿈꾸는 집을 위해 좋은 소스이자 자극제가 될 만하다. <행복이 가득한 집>은 1987년 창간해 인테리어와 건축을 비롯해 요리, 패션, 문화 예술에 관한 소식을 전하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셸터 매거진shelter magazine’을 지향해 가십이나 스캔들 기사 없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중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인기를 모았던 ‘라이프 & 스타일’ 칼럼을 선별해 건축, 공예, 인테리어,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집을 취재한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총 22채의 집 중에서도 집주인의 일과 삶이 집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몇 군데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가장 먼저 정재승 뇌과학자의 ‘책으로 지은 집’이 첫 장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신경세포 분야는 물론 사회, 과학,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의 촉수를 뻗기로 유명한 과학자다. 지금껏 그가 모은 책만 해도 2만여 권이 된다. “사방을 두른 책장에는 영감과 통찰의 실마리가 가득하죠. 가끔 책을 찾으러 올라갔다가 엉뚱한 책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앉아 한두 시간씩 보낼 때도 있는데, 바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필요한 일에 몰입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정재승 과학자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조민석 소장의 건축설계 덕분이었다.
조민석 소장은 집을 두 덩어리로 나눈 뒤 건물 각 층의 바닥 높이를 반 층차로 연결했다. 높은 천장고를 활용해 상단에 복층 구조의 서재를 만든 것이다. 반대편 반 층 계단을 오르면 서재의 넓은 홀이 나오고 다시 반 층을 오르면 서재의 연장선인 복도를 지나 자녀들 방이 이어지는 구조다. 이러한 설계 덕분에 서가를 따라 산책할 수 있는 동선이 마련됐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사실 책은 영감과 통찰을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 목표나 목적은 아니다”라는 정재승 과학자는 우연히 집어 든 책을 통해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일상 곳곳에 만들 수 있었다.
또 조경가 정영선의 집은 이팝나무, 노루오줌, 큰산꼬리풀 등 한국의 자생종으로 이뤄진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1호 졸업생이자 최초의 여성 기술사이며 한국 주요 공공 시설 조경의 한 획을 그었다. 정영선은 1986년 86아시안게임기념공원과 아시안선수촌아파트 조경을 맡아 한국의 산과 도시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주차장을 지하로 밀어 넣었으며, 지상은 국내 자생 식물로 녹지를 가꾸어 ‘사색의 정원’을 탄생시킨 바 있다.
그는 1997년 한강의 샛강을 메워 주차장을 만들자는 관리소장에게 김수영 시인의 ‘풀’을 낭송해주며 유일한 자연 하천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한 국토를 함부로 뭉개지 말고 그 특징을 살려 도시와 마을을 가꾸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러한 조경가로서의 철학은 그가 사는 집에도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우거진 자연 풍광을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감상하기 위해 집 안에 통유리로 된 온실을 설계하고 집 뒤로는 전통 정원의 기단을 만들었으며, 따뜻한 지하수를 퍼 올려 난방으로 이용한다. 한국을 ‘산으로 된 정원’이라 부르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영선은 자신의 집을 꾸릴 때도 터의 지형적 특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플로리스트 윤용신과 목수 이세일의 집 ‘목신의 숲’은 그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내 집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20~30대에 객지를 떠돌며 꽃 관련 일을 했던 윤용신은 할머니의 정원이 있는 해남 고향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세일 역시 학교를 졸업하고 불상을 조각하면서 훗날 독립하면 고향에 가서 살리라 마음을 품었다. 이런 각자의 굳은 결심은 둘을 해남에서 만나게 해주었다. 부부는 방 하나와 다락이 있는 조그만 돌집을 지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10년 전에는 문 닫은 중학교의 버려진 자재를 가져와 두 번째 집을 손수 짓기도 했다.
남자는 버려진 나무로 숟가락, 커피 스쿠프 등을 만들고 여자는 산과 들에서 나는 자연 재료로 리스와 꽃 장식을 만든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이 부모의 땅으로 돌아온 것처럼 자녀들도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도록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덧없고 세속적인 욕망보다 ‘내가 자리 잡을 곳은 어디일까,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어떤 몫을 하다 갈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잊지 않았던 부부의 집이 여느 집과 달리 소탈하면서도 멋이 넘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노은주, 임형남 건축가 부부가 쓴 서문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대사 “평범한 맛을 내는 것이 가장 어렵다”를 언급한다.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집으로 확장하며 그들은 집 역시 평범한 맛이 있는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취향으로 꾸미기보다는 집 안에 사는 가족 모두가 편안한 ‘보통의 맛’, ‘보통의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렬한 한 가지 향신료가 맛을 좌우하는 음식보다 여러 가지 재료를 오랜 시간 끓여서 우려낸 심심한 요리. 그런 음식은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맛이 부드럽고 온화하기 마련이다. 다시금 지금 우리가 사는 집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내가 사는 집은 나의 습관, 가치관, 생활 양식을 얼마나 담고 있는지 읽을 수 있는가? 지금 당장은 혼란스러운 것투성이라면 앞으로 당신의 집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나? 그 질문을 아름다운 책 <더 홈>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사유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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