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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노마드, 로컬

북 디자이너의 인도 라이프

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준

Text | Bora Kang
Photography | Ki-Joon Lee

북 디자이너이자 에세이스트인 이기준은 작업실을 자주 옮긴다. 낯선 장소, 낯선 사물이 주는 적절한 자극이 좋아서다. 여행을 자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기준 디자이너가 (왼쪽부터) 레바논 출신 판화가 하싼, 타라북스 직원 로히니와 함께 로히니 집에서 촬영한 모습.



당신의 산문집 <저, 죄송한데요>를 여러 번 읽은 애독자입니다. 책 마지막에 자신이 좋아하는 복장을 묘사한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지금 입은 옷을 설명해 주신다면요.

오늘은 요가 하는 날이라 룰루레몬 요가복을 입고 있어요. 인도에서 요가를 시작할 작정으로 준비해왔죠. 품질 좋은 인도산 천이 많다고 들어서 옷은 최소한으로 챙겨 왔는데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 아직 아무것도 못 샀어요. 인도 옷은 전부 슬림 아니면 스키니 핏인 데다 색상과 문양이 화려해서 입으려면 큰 결심이 필요해요.



인도 남부 첸나이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생소한 곳이네요.

일본인 저자가 ‘타라북스’라는 출판사를 취재한 책의 한국어판을 디자인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을 본 타라북스의 초청으로 오게 됐어요. 6개월간 공동작업하는 일정으로요. 타라북스는 핸드메이드 그림책으로 유명해요. 소수민족 예술가들의 그림을 폐직물로 만든 수제 종이에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해 수작업으로 제책하는 곳이죠.



요즘 하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소피 베니니 피에트로마르키라는 콜라주 작가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어요. 작가가 첫 인도 방문에서 얻은 영감으로 만든 이미지들이라 인도를 처음 방문한 제가 손을 대면 시너지가 나리라 기대하는 모양이에요. 작가의 작업과 제 작업이 뒤엉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저를 투영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새벽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나서 과일을 먹고 오전 작업을 합니다. 출판사 직원들은 보통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출근하고요. 점심은 디자이너들과 순번제로 만들어 먹어요. 처음 몇 주 동안은 식자재가 낯설어서 남들이 해주는 대로 먹기만 하다 요샌 당당하게 한 축을 맡고 있죠. 어제는 토마토, 양송이버섯, 고수에 라임즙만 뿌린 파스타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점심을 먹고 나면 저는 퇴근해요. 근무 시간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지내는 저를 다른 직원들은 무지 부러워하죠. 처음 몇 주 동안은 이 동네 저 동네를 탐색하러 다녔지만,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지금은 그냥 제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면서 오후를 보냅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요.



요즘 즐겨 먹는 요리는 무엇인가요?

방금 언급한 식당에서 파는 치킨 오믈렛이요. 마인지 오크라인지를 갈아 거품처럼 만들어서 얹은 오믈렛인데 식감이 독특해요. 한 번은 타피오카를 삶아서 콩이랑 먹었는데 쫀득하고 탱글한 물질이 입안에서 맴도는 느낌이 신선하더라고요. 남인도 특산물인 필터 커피도 좋아하게 됐어요. 딱 ‘다방 커피’ 맛이에요.







“커피잔, 가방, 펜, 필통, 안경, 옷 등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을 잘 고르면 제 주변만큼은 만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요.”




인도는 카오스 그 자체라 불리는 나라입니다. 정돈된 환경과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당신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안 그래도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해 주셨어요. 새로운 경험에 열린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오자마자 낙심했죠. 모든 걸 취소하고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한편으론 내가 너무 안락에 길들었나 하는 생각에 인생에서 반년 버린다 생각하고 무조건 버티자 마음먹었다가 30초 뒤엔 또다시 ‘아니, 대체 왜 버텨야 하는데?’ 반발하고. (웃음) 제 마음도 지금 카오스 상태에요. 속단하지 말고 다만 존재하자는 마음에 이르는 데 한 달쯤 걸린 듯해요.



그동안 방문한 곳 중 인상적이었던 공간이 있나요?

공간보다 이곳 문화가 인상적이에요. 도시 전체가 채식 위주에요. 여기 와서 ‘Non-veg’라는 단어를 처음 봤어요. ‘비 채식’이라니, 채식이 기본이란 뜻이잖아요. 식당 역시 대부분 채식 전문이고 비 채식 식당에 가도 채식 메뉴는 기본으로 있어요. 식당 메뉴는 물론 마트에서 파는 모든 식품에 채식(녹색 동그라미)인지 비 채식(적색 동그라미)인지 표시가 되어 있어요. 더 충격적인 건, 식당이나 마트에서 술을 안 판다는 점이에요. 맥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아무 데도 없어서 어찌나 놀랐는지. 주류 판매점이 따로 있다는 얘길 나중에 들었어요. 알고 보니 출판사 직원들도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더라고요. (웃음)








작업실을 중히 여기는 디자이너로 유명합니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이 있나요?

공간은 물리적이지만,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적거나 거의 없다는 점이 고약해요. 저는 그래서 소프트웨어에 변화를 주는 편이에요. 예컨대 물리적으로 멋진 공간은 많지만, 그 공간에 울리는 음악까지 만족스러운 곳은 거의 없으니까요. 한 가지 해결 방법은 저를 중심으로 반경 50cm까지만 신경 쓰는 거예요. 어떤 공간에서 제가 주로 하는 일은 노트북으로 작업하거나 책을 읽는 것인데, 그럴 때 커피잔, 가방, 펜, 필통, 안경, 옷 등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을 잘 고르면 제 주변만큼은 만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요. 대신 시선을 노트북 화면이나 책 너머로 멀리 두지는 말아야죠. (웃음) 여기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잘 고르면 어디서든 즉석에서 인테리어를 바꿀 수 있어요.



여행을 즐긴다고 들었어요. 흔히 ‘디지털 노마드’라 불리는 이런 삶이 창의적인 작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몸이 정신을 장악하는 타입이에요. 어디에 있든 정신이 적절하게 활동한다기보다 적절한 정신 활동을 하기 위해 몸을 물리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할까요. 낯선 장소, 낯선 사물이 적절한 자극을 주거든요. 아무 맥락 없이 완전히 새로운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창작은 결국 조합이라고 생각해요. 빤한 것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새로울 수 있어요. 여행은 지금까지의 저를 새로운 환경에 접목해 이런저런 연결점을 재점검하는 과정이에요.




“한 카페에 너무 자주 가서 편안해지면 다른 카페를 찾아요. 여행지의 낯선 카페에서 일하는 기분은 정말 좋죠.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단절이 편해요.”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는 인터뷰 답변을 본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도 집이나 작업실을 자주 옮기는 편이었나요?

돌이켜 보니 5~6년마다 이사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동네에서 지내는 잔잔한 흥분을 즐기는 편이에요. 지금 사는 연희동은 유독 마음에 들어 더 오래 지내고 있고요. 대신 카페를 자주 옮겨요. 집이나 작업실에 익숙해지면 더 긴장감이 생기지 않아 작업이 잘되지 않는 순간이 와요. 그럴 때 카페에 나가서 필요한 긴장을 유발하는 거죠. 한 카페에 너무 자주 가서 편안해지면 다른 카페를 찾아요. 여행지의 낯선 카페에서 일하는 기분은 정말 좋죠.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단절이 편해요.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는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요?

일단 이곳 생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어요.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계속 쓸 거예요. 마음이 가는 데도 기댈 데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뭘 쓸 수 있는지 훈련하는 셈이죠. 귀국 후의 생활과 작업에 대한 기대와 구상이 솔솔 피어나기도 하는데, 말을 앞세우진 않으려고요. 궁금하시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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