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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도시, 힙스터, 다양성

얼굴 그림으로 꾸민 일러스트레이터의 방

일러스트레이터 플로랑 마넬리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프랑스 파리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 플로랑 마넬리는 눈을 뜨자마자 핀터레스트를 검색한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 담배를 피우는 여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의 사진을 골라 그림을 그린다. 컬러풀한 색채 속에 눈, 코, 입이 또렷한 매력적인 얼굴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골똘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플로랑 마넬리Florent Manelli의 인스타그램 웹사이트에는 매일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웃는지 우는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은 한결같이 보는 이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고 있다. 연필 선과 파스텔컬러가 녹아든 얼굴은 쉽게 눈을 떼기 힘들다. 지난해 플로랑 마넬리는 얼굴 그림 작품을 모은 책 <40 LGBT + qui ont changé le monde>를 출판했다. 그는 작품으로 성소수자(LGBT)의 활동을 지지하고 사람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오늘은 어떤 얼굴을 그렸나요?

어제 저녁에 스케치한 3명의 인물에 색칠을 했어요. 새로 구입한 과슈(무광 불투명 수채 물감)를 시험하려고 물과 섞어서 칠해봤죠. 전에는 배경이 심플한 초상화를 그렸는데 요즘에는 여러 가지 모티프를 넣어서 그림을 그려요. (책상에 놓인 구사마 야요이 포스터 아래쪽를 가리키며) 이 그림처럼 인물 주변에 복숭아를 그려 넣는 식이죠.







그림 속 인물은 누군가요? 인스타그램을 보고 실제 인물인지 궁금했어요.

저도 잘 몰라요.(웃음)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사진의 인물이거든요. 사진을 고를 때 생김새는 중요하지 않아요. 성별도요. 사진 앵글, 빛, 포즈 방향 등 사진 자체에서 나오는 분위기에 따라 사진을 고르고 순간의 감정으로 그림을 그려요. 그림 속 얼굴은 제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있죠. 길에서 만난 이웃일 수도 있고요. 사실 저는 풀타임으로 환경 NGO에서 일해요. 남는 시간에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것이라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어떻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나요?

2013년 파리를 떠나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6개월간 인턴십을 한 적이 있어요. 경영학을 전공했거든요. 그곳에서 플랫메이트 엘레나Elena를 만났죠. 아이티 출신인 그녀는 공연 기획을 하는 뮤지션이고 흑인 차별 반대 운동가였어요.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는 외로운 도시에서 그녀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제가 6살 때부터 배운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죠. 그녀의 도움으로 몬트리올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어요. 파리로 돌아오는 여행 가방에 작업했던 그림을 잔뜩 가지고 왔죠. 파리에 다시 정착한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각진 턱, 움푹 들어간 볼의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시선을 정면으로 두는 것도 독특해요.

아마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거예요. 아직도 13살 때 친구 수첩에서 본 앤디 워홀의 핑크 컬러 메릴린 먼로 그림이 잊히지 않아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앨리스 닐Alice Neel, 장 콕토Jean Cocteau, 클로에 와이즈Chloé Wise 그리고 스페인 일러스트레이터 리카르도 카볼로Ricardo Cavolo, 카를라 푸엔테스Carla Fuentes, 마리아 에레로스Maria Herreros 등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거실도 그렇고 책상 주변 전체가 얼굴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어요. 이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사는 기분은 어떤가요?

글쎄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늘 새로운 얼굴을 찾고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타인의 얼굴이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네요. 이번 촬영 후에는 저를 골똘히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될 것 같아요.(웃음)



지금 한번 그들의 얼굴을 바라봐주세요. 유독 마음에 끌리는 얼굴이 있나요?

소파 위 프리다 칼로 초상화 위에 걸린 남자 얼굴요. 울고 있는 남자를 그린 것인데, 가장 최근에 시작한 시리즈 중 하나예요. 남성성에 의문을 던지는 그림이죠. 사회에서 남성은 무거운 책임감과 중압감을 이겨내야 한다고 강요받죠. 부모들은 남자아이에게 “남자는 우는 거 아니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잖아요. 우리는 인물을 보고 한눈에 성별을 구분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머리숱이 없는 아기의 머리에도 굳이 분홍색 헤어밴드를 씌우고, 그래야 여자아이라고 생각하죠. 여자는 착하고 상냥해야 하고 남자는 강하고 용기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태도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6, 얼굴 그림과 성소수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책 <40 LGBT+ qui ont changé le monde>를 출판했어요. 어떤 계기로 만든 책인가요?

책보다 전시가 먼저였어요. 3년 전쯤 다른 국가에는 성소수자 권리 운동에 대한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프랑스어로 된 책도 나오기를 바랐죠. 저도 성소수자의 일원으로 그런 책을 만들게 되면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림 전시를 열었어요. 전시하면서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생각지도 못한 호응을 얻었죠. 연이어 음악 페스티벌과 파리 시청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왔고, 출판사에서도 호의적인 응답을 받았어요. 책에는 전체적인 전시 내용이 담겨 있어요. 두 번째 책도 내볼까 생각 중이에요. 아티스트란 어렵거나 논란이 되는 주제를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요.




“사람이 전부예요. 사람만이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죠. 경쟁보다 공생이 필요한 시대잖아요. 집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이웃이 사는 동네는 기운이 달라요.”




프랑스는 2013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파리는 어느 도시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강하다고 들었어요.

파리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역사는 20년 정도 됐어요. 20년간 이어진 운동에 대한 사진, 글, 전단지 등을 모아 보여주는 파리 공공 아카이브를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여전히 실행되지 못하고 있어요. 그동안 법률이나 인권 측면에서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지만 현실적인 차별과 혐오가 여전히 존재해요. 법으로는 보호받아도 사람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거죠. 이런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성소수자 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요. 사람과 사람 간의 이야기잖아요.



얼굴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브랜드와 컬러버레이션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답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네요.

맞아죠. 사람이 전부예요. 사람만이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죠. 경쟁보다 공생이 필요한 시대잖아요. 집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이웃이 사는 동네는 기운이 달라요.



6년 동안 살고 있는 샤론Charonne이란 동네는 어떤가요?

6년 전 이 동네에 반해 이사를 왔어요. 샤론 거리(Rue de Charonne)를 따라가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독립 갤러리, 만화 가게, 전통 시장이 나오죠. 아파트는 아담한 중정이 마음에 들었어요. 파리에서는 집을 구하기가 어려운데, 두꺼운 서류를 제출한 후에도 결정되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해요. 임대인이 임차인을 고르는 식이죠.



파리는 집이 대체로 좁은 편이죠.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드는 거예요. 집이 스튜디오처럼 열려 있지만 제 나름대로 거실, 침실, 책상으로 분리해요. 침대와 책상이 붙어 있지만 침실에는 일부러 그림을 걸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는 공간이니까요. 책상에는 그림과 관련한 책, 도구, 작품이 모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어요. 생각이 멈추면 안 되는 공간이니까요.








예전에 <빌리브>와 인터뷰한 파리의 한 아티스트는 집은 턱없이 좁지만 집 밖의 생활이 즐거워서 파리에서의 삶이 행복하다는 말을 했어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얼마 전 서른 살이 되었는데 거주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파리에서 사는 삶과 일이 좋아 이곳에서 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니 오랜 시간 뿌리내리면서 살 수 있는 곳인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들면 상황도, 행복의 기준도 변하잖아요. 물리적 크기는 작지만 집에 담을 수 있는 행복은 커야 하는데, 요즘 파리 집세가 상식을 뒤엎을 정도로 비싸요. 한계치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1㎡당 평균 9510유로( 1245만 원)에 육박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어요. 9(약 2.7평) 크기의 다락방(chambre de bonne)에 입주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경쟁이 치열하다고요.

법적 최소 임대 공간이 9㎡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에요. 이보다 작은 공간도 불법으로 임대하기도 하고요. 곧 몇 년 후면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거주지 형태와 개념을 재고해야 할 거예요. 미래의 집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상들의 옛 건축 방식을 다시 살펴야 해요. 전통 건축 방식은 현대건축에 비해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하고 더 효율적이죠. 진흙과 짚을 섞어 집을 짓는 모로코 전통 집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요. 저는 유행처럼 번지는 ‘작은 집(tiny house)’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에요. 왜 우리가 작은 집에 살아야 하는지를 따지지 않고 물리적으로 작지만 심리적으로 큰 집이라고 설득하고 강요하잖아요. <엘르 데코> 매거진에서도 ‘작은 집을 더욱 넓어 보이게 하는 법’, ‘작은 집의 혁명’ 같은 기사를 대문짝만 하게 올리는데, 작은 집에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거주자들의 이야기를 특종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추상적인 이야기 말고 솔직한 접근이 필요해요.




“유행처럼 번지는 ‘작은 집(tiny house)’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에요. 왜 우리가 작은 집에 살아야 하는지를 따지지 않고 물리적으로 작지만 심리적으로 큰 집이라고 설득하고 강요하잖아요.”




집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저는 집에서만 그림을 그려요. 그림 작업을 위해서는 고요와 향기가 필요하죠. 여행을 갈 때마다 아로마 인센스를 구입하는데, 작년 12월 한국 여행에서 산 것도 있어요. 라벤더 향을 무척 좋아해요.



자신이 살 집을 직접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아니요. 시간을 품은 건축물을 선호해요. 공간을 새롭게 짓는 것보다 기존 공간을 제 것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이 더 재미있죠. 환경을 덜 오염시키는 일이기도 하고요.



만약 집에 관한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저에게 집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자 타인의 얼굴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또 하나의 동네예요. 그래서 소통 수단이자 동거인처럼 가까이 있는 연필, 색연필, 붓을 그려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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