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패션 디렉터 브루노 로렌차노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프리랜서 패션 디렉터로 활동하는 브루노 로렌차노Bruno Lorenzano의 집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이건 뭔가요?” “어디서 구입했어요?” “왜 이렇게 물건이 많나요?” 밀라노 브레라 지역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는 중국 앤티크 화병, 마리아 조각상, 철제 장난감, 말라가는 식물 등 뜬금없는 물건이 가득하다.
왜 이렇게 물건이 많나요?
10년 동안 모은 삶의 흔적이자 호기심 덩어리죠. 어떤 이에겐 장식품이거나 수집품일 수 있지만 저는 모든 물건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요. 어떤 물건과 제가 운명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유 없이 구입하는 경우도 있어요.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플리마켓을 꼭 방문하는데, 그때 산 물건은 자연스럽게 여행의 기억을 소환시켜주죠. 쓸모없는 물건일수록 호기심이 생기고 제가 그 쓸모를 만들어주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렇게 ‘쓸모 있는’ 물건이 되면 그것이 제 삶의 습관을 변화시키기도 해요. 결국 애착이 가는 물건이 되어 제 삶을 설레게 만드는 역지사지 현상이 일어나죠.
그런 설렘을 주는 물건을 몇 가지 소개해주세요.
모두 <천일야화> 못지않은 스토리가 있어서 딱히 고르기 어려운데… 우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플리마켓에서 구입한 곰 유리병요. 1940년대에 만든 것으로 독특한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런 디자인은 21세기에도 신선하죠. 두 번째는 놀이 기구 모양의 장난감. 태엽을 감으면 비행기가 앞뒤로 움직여요. 세 번째는 나폴리 마리아 성녀 조각상인데, 종교 물건을 수집했던 할머니에게 선물받은 거예요. 항상 저를 지켜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마지막은 여동생이 마흔 살 생일에 선물해준 글래디에이터 조각품. 오빠 취향을 잘 아는 동생이 기특해서 볼 때마다 미소 짓게 되는 물건이에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족 모두 물건 애호가인가 봐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서 40km 떨어진 작은 도시에서 자랐어요. 어린 시절 증조할아버지 댁에 자주 갔는데, 그 집은 다른 차원의 공간 같았죠. 시간, 삶, 여행 등의 단어가 덕지덕지 물건에 붙어 있었고, 손으로 디자인할 수 없는 어떤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었죠. 부모님도 빈티지와 골동품을 좋아했는데 하나를 구입하면 하나를 버리는 식이었어요.
벽에도 빈틈없이 빼곡하게 그림이 걸려 있네요.
스무 살 때 처음으로 뉴욕을 갔어요. 샤넬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여인이 제 팔을 낚아채더니 “이탈리아 사람이죠?”라고 묻더라고요. 이탈리아 신발을 신고 있다면서요. 그리고 이 그림을 사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2점을 샀죠. 나와 어떤 인연이 있을까 궁금증을 가지고 자주 보다 보니 지금은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이 되었어요. 여행을 가면 그림은 거리 예술가들에게 사요. 저기 걸려 있는 그림에는 뉴욕, 파리, 런던 등 도시 거리의 냄새, 풍경, 색깔, 감정이 물감처럼 묻어 있죠. 그걸 보며 상상을 하죠. ‘거리의 화가는 왜 이 장면을 골랐을까?’, ‘왜 이 여인을 그렸을까?’라고요. 어떤 물건을 사야겠다 마음먹고 갔었다면 상상하는 재미를 몰랐을 거예요. 그저 제 집에 어울리는지 고민하겠죠. 그래서 제 물건은 구입했다기보다 ‘찾아왔다’고 설명하는 게 맞아요. 실제로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 일부러 쇼핑한 적은 없어요.
그럼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그런 우연한 기회로 ‘찾아온 것’인가요?
맞아요.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물건 노트’에 우연과 사연을 일일이 기록하죠. 어디서 만나 얼마를 지불하고 어떻게 집에 가지고 왔는지 세세하게 적어요.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 물건과의 관계가 시작되죠.
“지금처럼 불안과 위험이 가득한 시기에는 사람보다 물건이 위안을 주죠. 가장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킨 것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비틀어지고 흠집이 났지만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쓴 물건을 더욱 소중히 아껴야 해요.”
나름의 인테리어 방식이 있다는 말인가요?
두서없이 놓인 것처럼 보여도 물건의 성격에 따라 자리를 잡은 거예요.(웃음) 물건끼리 서로 어울리도록 배치했죠. 때로는 앤티크와 모던을 함께 매치하기도 해요. 여기 이 옷장은 이케아지만 손잡이는 앤티크죠. (거실 테이블 밑을 손으로 가르키며) 이곳이 비어 있군요. 아마 다음 주면 새로운 물건으로 채워질 거예요.
자발적으로 불필요한 일과 시간, 물건을 줄여 삶의 본질적 가치에 접근하자는 미니멀리즘이 호응을 얻고 있어요. 당신은 반대의 삶을 사는 것 같네요.
지금처럼 불안과 위험이 가득한 시기에는 사람보다 물건이 위안을 주죠. 가장 오랫동안 내 곁을 지킨 것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비틀어지고 흠집이 났지만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쓴 물건을 더욱 소중히 아껴야 해요. 부담으로 다가오는 물건을 줄이고, 영감을 주는 물건을 가까이해야 하죠. 소유한 물건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방식은 버리세요. 소유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물건이 자신에게로 와서 쓸모 있게 되는 순간을 기쁘게 여기는 것, 물건 자체보다 물건에 얽힌 자신과의 이야기를 소유하는 즐거움을 알아야 해요.
솔직히 물건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지 않나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는데, 최근 어머니가 집에 와서 놀라시는 모습을 보고 고민하긴 했어요. 사실 다른 창고에 또 다른 물건이 있거든요. 4년을 주기로 취향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서 창고를 대여해 새로운 물건으로 채웠죠.(웃음)
하늘길이 막힌 지금, 여행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던 당신에게 무척 고달픈 시간일 것 같아요. 여행 대신 어떤 방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나요?
저에게 여행은 파티 같아요. 반드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하죠. 패션 분야가 워낙 빠르게 돌아가고 완벽주의자가 많아서 일하다 보면 자연히 에너지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 여행이 필요하죠. 요즘은 집에서 여행길에 우연처럼 다가온 물건들을 살피며 그때를 추억해요. 물건이 나에게 다가왔던 그 순간 그때의 햇살, 시간, 바람, 습도, 온도까지 세세하게 기억나요. 심지어 물건 판매자의 차림새까지. 물건에서 에너지를 얻죠.
“(올 초 이동 제한 기간에) 집에 머무는 동안 창을 통해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눴죠. 고향 나폴리에서는 대나무 스틱 위에 얹어 주고 받으며 길 건너 이웃과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기도 했어요.”
이탈리아 전 지역이 이동 제한령 때문에 집에서만 지내야 했죠.
3월 8일부터였던 걸로 기억해요. 다행히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물건으로 위로받을 수 있어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집에 머무는 동안 창을 통해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죠. 고향 나폴리에서는 대나무 스틱 위에 얹어 주고 받으며 길 건너 이웃과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기도 했어요. 코로나19 발생 이후 텍스타일 전문 브랜드 만테로 세타Mantero Seta를 포함해 관련 프로젝트가 보류되어 바쁘게 일할 필요는 없지만, 가능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요. 가장 힘들었던 점은 화상 통화였어요. 나폴리에 계시는 어머니가 수시로 화상 통화로 “물건을 치울 좋은 기회야. 얼른 싹 치워버려!”라고 잔소리하셔서 힘들었죠.(웃음) 집에서 옛날 영화를 많이 봤는데, 특히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 영화를 섭렵했어요.
물건을 좋아하고 탐구하는 일이 패션 일을 하는 데 영향을 끼치나요?
원래 복원 전문가가 되려고 했어요. 관련 논문을 준비하던 중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스타일리스트 잔프랑코 페레와 함께 일하던 여인이 색감과 비율에 능하니 패션 스쿨에 진학해보라고 조언했죠. 패션 스쿨을 다니면서 알레산드로 델라퀴아Alessandro Dell’acqua와 발리에서 인턴을 하고 미쏘니와 일하게 되었어요. 미쏘니와 작업하면서 제 물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영감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후 여러 브랜드와 일하고 싶어서 3년 전 프리랜서로 전향했는데 아마 패션 외에도 가구, 제품 등 다양한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이 물건이 그 바탕이 될 거예요.
집은 어떻게 구입한 것인가요? 디자인 동네로 유명한 브레라 동네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래 다른 동네의 아름다운 아파트에 살았는데 지하에 있는 나이트클럽의 소음 때문에 문제가 많았어요. 그곳 집주인이 이곳을 소개해줬죠. 물건처럼 아파트도 운명처럼 다가온 셈이죠. 해가 잘 들고, 양쪽에 창이 있어 통풍도 잘됐는데 이렇게 물건이 벽처럼 쌓이니 원래 공간과 좀 달라진 것처럼 보이네요.(웃음)
아직까지 불안한 상황이지만 유럽 내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어요. 어디로 향하고 싶나요?
19년째 꾸준히 찾아가는 그리스 섬 파트모스Patmos로 가고 싶어요. 관광객이 많지 않고, 늘 포근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이죠. 전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여름 휴양지는 바닷가 근처로 가야 해요. 그래야 밀라노의 겨울을 날 수 있어요.(웃음)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변화하게 될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까운 동네로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요? 이탈리아는 GDP 대비 관광업 비중이 13.0%에 달할 정도로 관광에 의존하고 있어요. 무리하게 여행 제한을 해제해도 관광 산업의 정상화는 어렵죠. 그래서 이탈리아인들이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국내 여행을 떠나야 해요. 하이킹, 캠핑, 야간열차, 자전거 여행 등 짧은 거리로 간편하게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마이크로 어드벤처’ 여행이 대세일 것 같아요. 생활 속 모험을 즐길 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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