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각본집 등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그래픽 디자인으로 주목받는 디자인 스튜디오 MHTL이 최근 사무실을 옮겼다. 무려 1년간 열정을 다해 물색한 공간이다. 조용한 동네, 높은 층고, 탁 트인 창문까지… 그들의 발품이 아깝지 않다.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능적이면서 동시에 아름답기까지 한 사무 가구와 오브제가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왼쪽부터) 맛깔손, 박럭키
두 분이 함께 일한 지 얼마나 됐나요?
(맛깔손) 제가 회사에서 독립해 혼자 작업한 지 1년이
안 됐을 때 만났어요. 2018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고요. 맛깔손, 박럭키, 이렇게 각자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2020년에 스튜디오 MHTL(More
Heat Than Light)을 설립했어요.
실명이 아닌 ‘맛깔손', '박럭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맛깔손) 회사에 다닐 때부터 개인 작업을 하고 싶어서 가명을 만들었어요. 회사원이기 때문에 외부 활동을 하기에 좀 어려운 점이 있었거든요. ‘맛깔손’은 당시 제가 살던 이태원에서 거의 유일했던 한식당 이름이에요. 단골이기도
했고요.(웃음) 닉네임을 사용하면 실명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뭔가 여지를 둘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서 이후 계속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박럭키) 동명이인이 많아서 활동명을 따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좋은 팀을 만나게 됐고 그때 ‘럭키Lucky’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일을 시작하자마자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이름의 뜻처럼 된다고들 하잖아요. 활동명을 럭키라고 한 이후로 운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최근에
MHTL 사무실을 새로 옮겼죠. 이전 사무실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박럭키)
저희가 사무실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창문이 커서
햇빛이 잘 들어와야 하고, 둘째는 화장실이 내부에 있어야 해요. 저희
멤버가 다 여성이라 야근할 때 화장실이 밖에 있으면 위험해요. 셋째는 층고가 높아야 해요. 예전 사무실도 이 세 요소를 다 충족해서 좋았어요. 다만 일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좀 더 넓은 장소로 이사 오게 된 거예요.
(맛깔손) 사무실을 거의 1년 정도 알아봤어요. 보통 바쁘지 않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동산에 연락해서 괜찮은 물건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가서 보고 오고 그랬어요. 저는 따뜻한 동네로 가고 싶었어요. 이곳은 공원, 학교 운동장 같은 유휴 공간이 많아서 좋아요. 코로나19 이후로는 외식도 줄이고 있어요. 마침 이번에 이사하면서 사무실에 탕비실을 마련했는데 아침에 간단히 요거트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동네 분위기나 햇빛 같은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로서 사무실을 제대로 만들어놓고 운영한다는 건 당연하면서도 정말 힘든 일이에요. 프린터와 커팅 기계, 싱크대 등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인데, 그 당연한 걸 꾸리기가 어렵거든요. 지금까지 사무실을 찾기 위해 애쓴 과정을 에세이로 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이었어요.
책상이 멋지네요. 직접 디자인한 건가요?
(맛깔손) 스튜디오 COM에 의뢰해서 만들었어요. 저희가 실제로 일할 때 어떤 식으로 책상을 쓰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저희 스튜디오의 업무 환경에 최적화된 상태로 디자인해주셨어요. 바로 전 사무실에서는 시스템 가구를 사용했어요. 가로가 좁고 폭이 넓은 책상이었는데, 저희가 모니터를 가까이 당겨서 쓰니까 뒷부분은 아예 사용하지 않더라고요. 또 사무실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옆 사람과의 거리가 중요했어요. 옆에 있더라도 서로의 모니터가 안 보이도록 설계하려니 가로 길이가 2m 정도 되어야 했죠. 결과적으로 폭은 좁고 가로 길이가 긴 모양으로 만들어졌어요.
북서울미술관에서 했던 전시
(박럭키)
SF 소설과 미술 작업을 연계하는 전시였어요. 제목부터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따오는 등 여러 가지로 컨셉추얼한
기획이 돋보여서 이 감각을 최대한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전시장을 하나의 우주선처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맛깔손) 공간을 전시장이라 상정하지 않고 우주선이나 비행기에 탑승할 때처럼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이 감도는 장소로 만들었어요. 또 실제로 방문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온라인 공간을 구축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SF 영화를 보면 인트로 신에서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씬이 나오잖아요. 전시 웹사이트에 텍스트와 배경 이미지를 그런 느낌으로 표현했어요. 공간 같은 경우에도 신경을 많이 썼는데, 북서울미술관의 층고는 약 7m로 공간감이 다른 어떤 미술관보다 압도적이에요.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메인 입구를 탑승 게이트의 파사드로 상정하고 가로 길이 8m의 거대한 로고 타입을 사이니지로 표현했어요.
사진 제공: MHTL
클라이언트로부터 프로젝트를 의뢰받으면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하나요?
(박럭키)
보통 4단계를 거쳐 진행하는데요, 제일 먼저
리서치를 해요. 디자인이 필요한 대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공부하는 단계예요. 콘텐츠 자체를 심도 있게 알아보고 SNS에서 보이는 현실적인 반응도
꼼꼼하게 조사해요. 클라이언트의 취향과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들과 소통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요. 다음 단계에서는 도출한 키워드를 통해 세계관을 설계해요. 가끔은
짧은 이야기를 쓸 때도 있어요. 가령 이곳은 전시장이 아니라 SF 세계를
항해하는 우주선이고 관람객은 선원이 된다는 식으로요. 이후에는 세계관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씬을 만들어요. 이 장면에 저희가 설계한 모든 디자인 규칙을 담아요. 공간 전체를
가로지르는 아트 월에 표현할 때도 있고 A0 크기의 포스터 한 장에 함축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모든 설정이 완성되면 릴리즈 하기 전까지 목업 테스트를 계속해요. 화면
속 데이터를 실제 공간에 최대한 잘 표현하기 위해서죠.
(맛깔손)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마지막 목업 단계예요. 특히 브랜딩 디자인일 때는
더욱 중요해요. 저희는 맥락이 없는 디자인을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해요.
실제 공간에 저희의 디자인이 어떤 모습으로 놓여 있을지 상상하기 위해 1/10 사이즈로
모형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직접 포스터를 붙여봐요. 건축가는 아니지만 거의 그런 마음으로 목업에 임해요. 아마도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 그런 것 같아요. 공간 디자이너와
굉장히 긴밀하게 협업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저희는 공간이 오픈하고 나서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살피는
편이에요. 마치 디자인 경찰처럼요.(웃음) 완성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사소하게 마주치는 디자인이 모여서
경험이 되고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에요.”
요즘 생기는 카페, 레스토랑, 숍 등 다양한 브랜드 공간을 볼 때 지양할 점을 꼽자면요?
(맛깔손)
의미 없이 같은 메시지가 반복되는 디자인이요. 가령 타이포그래피를 표현할 때는 반드시 이유나
의미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내용보다 형식이 앞서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디자인은 지양했으면 좋겠어요. 브랜딩에서는 특히 콘텐츠보다 디자인이 앞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박럭키)
맞아요. 의미 없는 디자인이 SNS를 통해 소위
‘핫플’이라 퍼지고, 마치
좋은 디자인인 것처럼 대중에게 전달되는 현상을 보면 늘 신경이 쓰여요. 좋은 디자인을 자주 접하면 사람들도
분명히 그 차이를 알고 느낄 수 있을 텐데, 사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 진짜 좋은 건지 알아내기가
힘들죠. 그러다 보면 디자인을 바라보는 미감이 전체적으로 낮아지고 계속해서 의미 없는 디자인의 수요가
늘어나는 거죠.
(맛깔손) 그래서 일상적인 공간의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원, 거리의 간판, 주택 골목, 지하철, 버스 정류장, 공공 기관처럼 대중이 매일 접하는 공간의 디자인을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사소하게 마주치는 디자인이 모여서 경험이 되고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에요.
두 분은 어떤 집에 살고 있나요?
(박럭키) 가족과 개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어요. 20년
가까이 산 집이에요. 평일에는 주로 일을 하다 보니 주말만큼은 집에서 쉬면서 개와 동네 한 바퀴 도는
걸 좋아해요. 조만간 독립해서 살 계획인데 언젠가 떠날 생각을 하면 섭섭하기도 해요.
(맛깔손) 집에 컴퓨터가 없어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위해서 집 안에 워킹 스페이스를 안 들이기로 결심했어요. 집에서 일하느라 바로 코앞이 한강인데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거든요. 제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에토레 소트사트가 1981년에 디자인한 트리톱스Treetops 플로어 램프예요. 높이가 거의 2m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 이사를 준비 중인데, 이 조명을 설치하고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가려면 최소 30평 이상은 되어야겠더라고요. 아주 골치 아프게 됐어요.
살아보고 싶은 집이나 동네가 있다면?
(박럭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강아지와 함께 다닐 거라 안전한 동네라면 좋겠어요. 회사
근처 연남동도 강아지와 산책하기 좋은 동네 같아요. 한남동이나 망원동도 그렇고요. 독립하면 개를 데리고 나올 건데,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좋겠어요.
(맛깔손)
MHTL의 사무실과 집, 디자인 숍 등이 있는 건물요. 마치
타운처럼 만들어서 저희가 만든 가구도 팔고, 책방도 운영해보고 싶어요.
그곳에서 일도 하고 영감도 받고 쉴 수도 있는 그런 복합적인 공간을 꿈꿔요. 코로나19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