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IV

PEOPLE|커뮤니티, 큐레이션, 홈데코

청파동과 남영동 사이, 2080년의 런던

보연정 대표 정보연

Text | Kakyung Baek
Photos | Hoon Shin

보물처럼 소중한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간, 보연정. 12년 동안 플랫폼 마케터로 일했던 정보연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이곳을 2080년의 런던과 도쿄로 상정하고,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위스키와 시가, 영화, 재즈 등에 대한 흥미로운 클래스와 모임을 기획한다. 보연정의 문을 여는 순간,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보연정(姸亭)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세요.

'정보연'이라는 제 이름은 아름다운 보물이란 의미가 있어요. 제가 이곳에서 나누려고 하는 것도 귀하고 소중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예요. 제 이름의 ‘고무래 정()’을 ‘정자 정()'으로 바꾸어서 이름을 지었어요. , , , , , , 헌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 한자어가 있지만, 집의 단위 중에 가장 작고 쉼을 의미하는 정자라는 단어를 붙이게 되었어요. 정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에요. 연못이나 강가 등 물과 가까이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위스키의 성질과도 잘 어울리죠. 보연정에서는 전시, 클래스, 워크숍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매개로 가치 있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보연정이라는 독립적인 공간을 연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보연정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 제가 평소 좋아하는 시가, 위스키, 차 문화 등을 문화 콘텐츠로 기획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사람들이 보연정에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감상한 후에 집에 돌아가서도 그 감흥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커피 클래스를 예로 들면, 커피를 추출할 때 여러 방법이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나만의 취향에 맞는 추출법이 무엇인지를 찾고,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도록 클래스를 기획해요.








<하루의 끝, 위스키>의 저자이기도 한데, 언제 처음 위스키의 매력을 느꼈나요?

첫 직장을 다닐 때 야근이 정말 많았어요.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그 하루를 보상받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에는 혼술문화가 자리 잡기 전이었는데, 어느 날 퇴근길에 바에 들러 위스키 한잔을 마셨어요. 그때 마신 위스키의 향기, 바의 온도가 제겐 위안이 됐죠. 야근 후 나만의 의식처럼 바에 갔던 것 같아요. 또 제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바텐더에게 위스키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거든요. 그걸 보고는 현재 티앤프루프를 운영하시는 박성민 오너 바텐더께서 제게 미니 오크 통을 선물해주셨어요. 이 오크 통에 화이트 스피릿 진을 담으면 브라운 스피릿으로 변하는데, 이것이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 중 하나라며 집에서 실험해보라고 하셨거든요. 제겐 그 실험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고 그때부터 위스키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죠.










보연정에서 열린 전시 <다취상점 첫 소품전: 카모메 식당으로부터> 핀란드 드링크와 시가 페어링 클래스를 진행하셨죠. 어떤 내용이었는지 궁금해요.

당시 전시 주제로 삼은 것이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였어요. 일본인 여성들이 핀란드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여성들이카모메 식당이라는 공간을 매개체로 소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죠.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마사코라는 인물이 잃어버린 가방을 찾고 여러 사람과 함께 바다를 보며 맥주를 마셔요. 마사코가 사색에 잠겨 시가를 태우는데, 그 장면을 오마주해 클래스를 기획했어요.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핀란드의 커피, , 위스키 등과 어울리는 시가를 찾는 방법, 마리아주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보연정은 청파동 기찻길 근처에 자리하고 있어요. 이곳을 택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그간 여러 작업실을 거치면서 제게 필요한 공간이 어떤 곳인지 기준이 세워졌어요. 첫 번째는 교통이에요. 제가 어떤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면 주로 직장인이 많이 참여하기 때문에 서울 어디서든 접근하기 쉬운 곳이어야 했어요. 두 번째는 독서 모임이라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주거지역처럼 소음을 신경 써야 하는 곳은 피했어요. 세 번째는 서울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길 바랐죠. 코로나19 상황이 지나면 글로벌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이 세 가지 기준이 충족되는 곳이 바로 보연정이 자리한 동네예요. 보연정을 반대편 도로에서 바라보면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고 그 앞으로 기차가 지나가요. 그 자체로 서울의 상징적 단면을 보여주죠.








1, 2층으로 나누어진 공간의 구조가 독특해요.

과거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주로 1층에서 장사를 하고 2층에서 주거를 했다고 해요. 2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2층 내부는 목재로 만들어졌어요. 저도 처음에 흥미롭게 여긴 부분이에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보연정의 콘셉트와도 잘 맞았죠. 이전 간판인청파모타를 떼지 않았고, 내부 공간도 최대한 그대로 살려서 사용하고 있어요.




새것을 살 때는 내가 할머니가 돼서도

사용하고 싶을까?’라고 자문했어요.”




맨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어떤 청사진을 그렸나요?

1층은 2080년의 런던, 2층은 2080년의 도쿄라고 상정했어요. 지금부터 그때까지 사용할 만한 물건, 그때도 유효한 이야기를 담은 물건으로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죠. 중고 시장에서 구한 1920년대 물건부터 현대적인 물건까지 섞여 있어요. 특히 새것을 살 때는 내가 할머니가 돼서도 사용하고 싶을까?’라고 자문했어요. 꼭 필요한 것인지, 무분별한 소비가 아닌지 점검하기 위해서요.








2080년의 런던으로 상정한 이곳에 특별한 사연이 얽힌 물건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이곳을 계약하던 날 우연히 당근마켓을 봤어요. 톤 체어가 정말 저렴한 가격에 올라왔더라고요. 바로 그곳을 찾아갔는데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갔던 혜화동의 펍이더라고요. 깨끗하고 예쁜 것들은 이미 팔렸고 상처가 있거나 색이 바랜 의자와 테이블만 남아 있었어요. 오히려 사람들의 이야기가 깃든 가구가 보연정에 더 어울리겠다고 생각해서 가져왔어요. 또 하나, 저기 있는 그릇 장식장은 원래 CD 수납장이었어요. 이촌동에 사시는 아주머님이 내놓은 가구예요. 저는 누군가 사용했던 물건을 가져올 때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수집하곤 해요. 아주머님은 이 가구에 CD를 수납했고 제일 위칸에 그 달에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반을 골라 넣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 가구를 작은 그릇을 넣어두는 용도로 예쁘게 잘 사용하고 있다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렸어요. 물건이 그냥 버려지지 않고 또 다른 용도로 새롭게 태어나는 상황을 공유한 거죠. 이처럼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어요.








12년간 플랫폼 마케터로 활동하면서 누구보다 새롭고 빠른 변화 속에서 일했을 텐데, 오래되고 가치 있는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소비왕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물건을 많이 사는 타입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비에 대한 저만의 가치관이 생겼어요. 누구나 자신만의 관심 분야에서는 가치 소비를 해요. 자신만의 감식안으로 선별해 좋은 물건을 사려고 노력하죠. 세상 모든 물건을 다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려면 물건 안에 깃든 이야기를 들여다봐야 해요. 저는 보연정에서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눠보고 싶었어요.



마케터로 일하면서도 시가, 위스키 등 다양한 취미 생활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가고 계세요.

저는 학습 시간이 상당히 길었어요. 20대부터 30대 초·중반까지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학습하느라 저 자신을 에듀케이션 푸어education poor’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제 소비의 대부분이 자기 계발을 위한 비용이었거든요. 지금도 여전히 공부하고 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까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서 나아가 생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연정을 계기로 여러 기획자, 콘텐츠 생산자와 협업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하게 됐고요.








취미가 이렇게 다양한데 집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과 함께 살아요. 제 방은 단출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걸 꼽자면 작은 스테레오예요. 저희 아버지께서 음악을 정말 좋아하세요. 제 유년 시절부터 저희 집 거실엔 TV가 없었고 가족이 함께 음악을 들었어요. 저도 그 영향을 받아서 쉬는 날엔 방에서 음악을 많이 들어요. 그리고 제 옷장을 열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죠. 옷장의 1/3만 본래 용도로 쓰고 나머지는 술과 관련한 책, 제가 수집한 책, 빈티지 물건이 가득 쌓여 있거든요. 최근에는 재떨이 수집에 푹 빠졌어요. 과거 유럽 국가에서는 여성의 흡연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대요. 그때 웨지우드 같은 도자 브랜드에서는 기본적으로 재떨이를 생산했죠. 아름다운 중년 그리고 할머니를 꿈꾸며, 그 당시의 아름다운 재떨이를 수집하는 게 요즘 저의 취미입니다.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이 있나요?

저는 이미 좋은 집에 살고 있어요. 좋은 집은 물질적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마음이 편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에는 저희 집이 어머니의 기획에 따른 것이었다면 시간이 흐르고 집이 낡으면서 제 취향에 맞는 물건을 제 방에 들이기 시작했어요. 침구, 커튼, 그림 등 나만의 취향을 보여주면서도 심적으로 안정을 주는 이 방이 제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에요. 제가 훗날 독립해 가정을 꾸리더라도 가족이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RELATED POSTS

PREVIOUS

나와 오브제와의 관계, 그 친밀감이 편안한 곳
라이팅 디자이너 마이클 아나스타시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