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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노마드, 로컬, 비대면

영국 해안가 푸르고 시린 자연을 그리는 삶

회화작가 막스 클레멘츠

Text | Nari Park
Photos | Max Clements

파란 유화를 머금은 붓 끝에서 완성된 비정형적 선과 도형의 응집체. 푸른 하늘 또는 바다의 일렁임을 담은 추상화들은 영국의 회화 작가 막스 클레멘츠의 작업을 대표한다. 마티스의 푸른 드로잉이 연상되는 그녀의 담백한 회화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왔다. 영국 서퍽 지방 해안 기슭에서 붓끝에 삶의 궤적을 담는 작가의 삶을 들여다봤다.









예술이 우리 삶을 치유하고 위안을 준다는 그 불변의 진리를 몸소 깨달은 작가의 작업만큼 솔직한 결과물이 있을까. 영국 서퍽 지역 해안가에서 생활하는 막스 클레멘츠Max Clements의 정제된 추상화들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출산 뒤 긴 시간 암 투병으로 삶의 끝자락까지 내몰렸던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붓끝에 실어내며 비로소 위안을 얻었다. 모호한 선과 도형들을 그리며 고통스러운 가족의 비밀을 풀기 시작했고, 화폭에 담은 상상의 풍경들은 오늘날 많은 이들을 위로한다. 2차 대전 당시 사용했던 오래된 창고를 작업실로 사용 중인 작가의 고요하고 정제된 전원생활을 따라가 봤다.



아티스트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감각과 시선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요?

항상 미술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아요. 채색하고 무언가 만드는 일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었죠.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으로 영국 콘월에 자리한 팔모스 아트 컬리지Falmouth Art College에 진학했고, 3학년이 되었을 때 밀랍을 부어 주물을 뜨는 전통적인 ‘로스트 왁스 브론즈lost wax bronze’ 주조 방법을 알게 됐어요. 영국 전역의 청동 주조 공장에서 스튜디오 어시스턴트와 매니저 업무를 경험하면서 서퍽Suffolk에서 청동 주조소를 운영하는 조각 스튜디오와 연이 닿아 현재의 집에 자리 잡게 됐죠.








‘건강을 크게 다치고 나서야 스스로 삶의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말씀을 하셨어요.

딸을 낳고 유방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됐죠. 투병 생활은 제게 아무런 이유 없이 예술을 하는 것이 정말 괜찮다는 사실을 일깨워 줬어요. 그전에는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자 애쓰고는 했거든요. 작품을 만드는 건 제 감정과 생각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치롭게 풀어 줍니다. 암 치료를 받고 회복하는데 예술만큼 위안과 치유를 주는 것은 없었어요.








추상적인 선과 형태를 주제로 한 그림들의 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비정형적 선과 모양을 그리는 일이 항상 자연스러웠으니까요. 돌이켜보면 미술대학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모호한 선과 도형을 그려냄으로써 고통스러운 가족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고, 화폭에 담아낸 상상의 풍경들을 통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도피할 수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죠. 지금은 추상적인 선과 형태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제 감정을 표현하는 일종의 치료라는 것이 어느 때보다 확실해진 것 같아요.








유독 파란색만 사용하는 당신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평온하고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수많은 컬러 가운데 ‘블루’를 고집해온 이유가 궁금해요.

투병 중 파란색 잉크 만년필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밑그림을 전개하고 확장하기 위해 파란색을 머금은 붓을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웠죠. 잉크가 묻은 붓이 종이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면 그다음 모양을 연결하는 것이 한결 편했어요. 제가 작품 속에 구현하는 파란색은 일종의 ‘명상’ 같은 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진정되게 한다는 것을 작업하며 알게 되었어요. 색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 만들고자 하는 형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도 하고요. 다채로운 색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을 즐기지만 제 그림에서는 색을 섞는 것이 자칫 산만하게 느껴져요.








작업에 영감을 주는 행위나 대상이 있을까요.

큰 숲과 여러 해안 도로가 인접한 곳에 살고 있다 보니 풍경 속을 거니는 것을 즐깁니다. 작업이 풀리지 않을 땐 종종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러면 새로운 아이디어나 작품을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곤 하죠.



많은 작가들이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하는데, 당신의 작품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나요?

유년 시절 영국 켄트 지방과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사이 유럽 일대를 차로 여행하고 캠핑도 즐기며 보냈어요. 그때 마주한 풍경들은 매우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고 그런 이유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며 자연 풍경을 화폭에 담게 되었어요. 켄트 지역 평평한 습지 끝으로 피어오르던 수평선, 완만한 이탈리아의 언덕과 거대한 산악지형 같은 것들이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일반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연필을 사용해 스케치북에 직관적으로 모양을 그리는데, 스튜디오로 옮겨 유화로 더 큰 작품을 그릴 때 많은 참고가 되죠. 이 과정은 형태와 형태 사이의 생명, 에너지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에요. 초기 드로잉 작업이 잘되지 않으면 종종 몇 달 동안 그리던 그림을 그대로 놔두거나 작업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죠. 유화로 그림을 그릴 때 형식은 대개 과정 속에서 스스로 구성되곤 합니다. 하나의 선과 도형을 통해 다음 작업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할까요. 의도적이면서도 의도치 않는 과정들을 모두 즐겁게 즐기고 있으며 동일한 아이디어를 다른 방식으로 탐색할 수 있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해요.










영국 남동부에 자리한 서퍽 지역 해안가에서의 삶은 어떠한가요? 하루 일과 가운데 행복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

서퍽에서의 삶은 매우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요. 비록 제 하루는 일상적인 집안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매 순간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기상해 그날 결과를 보내는 것을 좋아해요. 제 그림은 확실히 이러한 접근 방식을 반영하는 것 같아요. 작품을 구상할 때 직관적인 생각을 고수하면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에게 의미 있는 순간은 딸, 남편과 함께하고,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에요. 이 균형을 맞추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제 일을 지지해 주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죠.







서퍽에서의 삶은 매우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요. 매 순간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기상해

그날 결과를 보내는 것을 좋아해요.”







작가에게 스튜디오는 집 이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공간일 텐데요. 작업실을 설계하고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들은 무엇인가요.

스튜디오는 저희 집 주방 맞은편 가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고 검은 창고로 사용했던 것이에요. 본디 전쟁 중 마을에 전투 훈련을 위해 찾은 군용 차량을 점검하는 검문소로 사용되었죠. 실내 나무 벽에는 당시 번호판을 적어야 할 때 종이가 부족했던 근무자가 작성했던 숫자,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들을 연필로 작성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최대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 자체를 보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지닌 작업실에 들어서면 저를 감싸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요. 다른 곳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죠.








그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작업실을 일컬어 '베어 루트 로지즈Bare Root Roses' 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2018년 무더운 여름 동네를 달리던 중 길가의 ‘Bare Root Roses’라는 광고 게시판을 보게 됐죠. 당시 항암치료를 받던 중이었는데, 제 기분을 완벽하게 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종과 암을 경험했던 제 자신이 마치 벌거벗은 마른 뿌리 같았고, 장미는 그럼에도 제 자신이 품은 성장과 생명, 잠재력 같다고 느꼈죠.








아늑하고 아담한 코티지 하우스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요?

코티지 하우스는 매우 매력적이에요. 낮은 천장, 벽난로, 굽은 가파른 계단, 나무 빗장, 납으로 만들어진 창틀. 방마다 각각의 특징이 있죠. 하루 종일 볕이 들이 쬐는 부엌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요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공간은 욕실이에요. 창밖으로 다양한 나무를 내다볼 수 있는데, 특히 봄이면 푸른 하늘 아래 밝고 아름다운 풍경을 내다볼 수 있어 좋아요.



집은 삶을 살아갈수록 한 사람의 인생에 더욱 중요한 공간이 되어간다고 생각해요. 집이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유일한 안식처죠. 스스로가 가장 자유롭게 느끼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작품을 살펴보고 소장할 수 있는 공예 편집숍이나 갤러리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제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Bare Root Roses를 통해 직접 구매하는 분들이 많지만, 온라인몰을 선호하는 분들에게는 아래 몇몇 플랫폼을 추천해요. 콘월에 자리한 North Coast Asylum gallery, 저희 지역에 자리한 Fairhurst gallery, The Merchants Table 같은 곳이 대표적이죠.





막스 클레멘츠의 유화 작품 ‘Rhythm’




데믹 이후로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름다운 사물들로 공간을 채우고 취향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당신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리듬Rhythm'이란 제목의 유화 작품을 꼽고 싶어요. 2020년 영국 노스 코스트 어사일럼 갤러리Asylum Gallery에서 연 개인전 에 소개됐던 작품이에요. 푸른 색조와 질감, 부드러운 형태가 의도하지 않은 깊이와 아름다움을 담고 있죠. 'Blue Echo III'도 추천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밝고 희망적인 기운을 느낀다는 평을 많이 받았던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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