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기슭을 은평구의 축복이라 부른다. '캄파리 프린스'를 만나러 왔다며 기슭을 찾는 손님도 있다. 불광동의 한 조용한 골목에 자리한 기슭은 간판조차 없지만, 그 자체로 매력적인 아우라를 풍긴다. 이곳을 찾아온 수고를 달래주는 훌륭한 칵테일과 엄선한 음악, 기슭 파트너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손님의 마음을 빼앗는 건 시간문제다.
기슭, 곱씹을수록 멋진 이름이에요.
구체적인 공간의 모습, 위치 등을 정하기 전에 기슭이라는 이름을 먼저 지었어요. 기슭은 산이나 강의 낮은 면을 일컫는 말이에요. 조금 낮은 곳에서 매일 밤 찾아오는 손님을 주인공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어요. 또 기슭이란 단어 자체에 신비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괜히 궁금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지향하는 바bar 이미지와도 잘 맞고요. 기슭에 담긴 모든 것을 얘기하면 조금 재미없어지지만, 기슭을 영어로 표기하는 것도 고심했어요. 직관적으로 보이는 '키스kiss'라는 단어를 의도해서 ‘Kissk’이라 표기했죠.
“제 주변 사람들도 왜 비상업권인 이 동네에 바를 오픈했느냐고 많이 물었어요.”
불광동에 바를 차린 이유가 있나요?
제 주변 사람들도 왜 비상업권인 이 동네에 바를 오픈했느냐고 많이 물었어요. 하지만 저는 동네 바를 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청담, 한남, 홍대 등에 멋진 바가 많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겐 불광동에 있는 기슭이 동네 바일 테니까요. 또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과 기분 내러 가는 곳이 바일 수 있지만, 제가 처음 느낀 바는 바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만의 시간을 보내러 가는 곳이었어요. 가볍게 독서를 하거나 바텐더와 시시콜콜 농담 따먹기를 하기 좋은 그런 편안한 곳.
동네 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동네 바는 어떤 곳인가요?
제가 처음 갔던 한스 바라는 곳이에요. 키치한 분위기의 네온 조명이 켜져 있었고 지하로 내려갈 때 퀴퀴한 곰팡내가 났죠. 지금은 그곳이 없어졌는데 그런 냄새를 맡으면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제겐 마치 고향 같은 느낌이죠. 그곳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각자 사는 이야기를 하고 바텐더 형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어요. 제가 숫기가 없는 편인데 그 바에 가면 괜히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네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맨 처음 이 공간을 꾸릴 때 어떤 모습으로 만들고자 했나요?
공간 디자이너에게도 최대한 중성적 분위기로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이름은 기슭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만한 기슭의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려 했고요. 공간이 돋보이기보다는 기슭을 찾는 손님, 저희가 만드는 음료가 더 돋보일 수 있도록요.
2019 아시아 캄파리 바텐더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죠. 여러 대회 중에서도 이 대회가 갖는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전에 캄파리라는 술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요.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잘 어울리는 이탈리아 식전주예요.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와 허브, 감귤 껍질 등이 들어 있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술이에요. 제가 참여했던 대회는 아시아 14개 국가를 대상으로 연 대회였죠. 제가 처음 접한 칵테일이 캄파리가 들어간 칵테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대회에도 여러 번 출전했지만 캄파리 바텐더 대회에서만큼은 꼭 좋은 결과를 내고 싶었어요. 정말로 몰입해서 대회를 치렀던 기억이 나요. 요즘도 어떤 손님들은 저를 ‘캄파리 프린스’라 부르며 찾아주시곤 해요.
당시 대회에서 영예를 안겨준 칵테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캄파니아 투미Campania To-Mi’라는 칵테일이었어요. 이탈리아 마르게리타 피자에서 영감을 받아 올리브, 치즈 등을 한 잔에 담은 칵테일이에요. 2019년에 이 칵테일로 수상한 뒤 코로나19가 심해져 많은 분께 선보이지 못했지만, 기슭의 아페리티보 아워Aperitivo Hour 때 오면 맛보실 수 있어요.
아페리티보 아워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세요.
캄파리라는 식전주를 포함한 더 큰 개념이라 할 수 있어요. 단순히 낮술을 마시는 시간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카페테리아에 앉아 햇빛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문화 전반을 뜻해요. 국내에서는 낮술 한다고 하면 아직은 부정적 이미지가 많긴 해요. 하지만 요즘에는 회사원들이 연차나 반차를 내고 낮에 바를 즐기러 오시는 분도 굉장히 많아요. 조금 더 느긋하게 여가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기슭에서는 특별한 안주를 낸다고 알고 있어요.
증산역 근처에 뻥튀기 공장이 있어요. 다른 곳보다 더 고소하고 바삭한 식감을 자랑하는 뻥튀기를 드리고 있고요. 또 시장에서 바로 사 온 신선한 안주를 내드려요. 코리안 샤퀴테리라 할 수 있는 순대도 있어요. 언젠가 팀원들끼리 순대를 안주로 와인을 마셨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이탈리아 식전주나 유럽의 허브 술과의 조합이 의외로 좋아요. 코로나19로 어쩔 수 없이 낮부터 기슭 문을 여는데, 재미있게 해보자고 마음을 다졌죠. 기슭에선 편견을 깨는 작업을 재미있게 해나가려 해요.
기슭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처음 경영자로 일하는 거라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시공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이 공간에 있는 게 너무 괴로운 적도 있었죠. 하지만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기슭 문을 연 다음, 전부터 알고 지내던 단골들이 많이 찾아와 응원해주셨어요. 또 기슭을 동네 바로 여기는 손님들도 주변에 많이 생겼고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기슭은 은평구의 축복이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를 열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공간을 컨트롤하는 사람이 호스트라면 바를 컨트롤하는 건 바텐더이죠.”
술과 공간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공간이란 개념이 크고 추상적인 것 같아 어렵게 느껴지네요. 술이 있는 공간이라고 하면 쉽게 바를 떠올릴 수 있죠. 바에서는 술을 마시며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홈 파티라고 생각해요. 공간을 컨트롤하는 사람이 호스트라면 바를 컨트롤하는 건 바텐더이죠. 바텐더들이 자신의 공간에서 준비한 술, 음악, 바이브를 손님들이 즐기러 온다고 생각해요.
바텐더라는 직업에 매력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원래 미술을 전공했어요. 그러다 세상 경험을 하고 싶어서 20대 초중반에 호텔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림을 그리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 데 반해 호텔에서는 제가 한 일에 대한 피드백이 빨랐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또 다른 재미가 느껴지더라고요. 한스 바에서 바텐더가 전해주는 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매료됐어요. 그곳에 찾아온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푹 빠지게 됐어요. 호기심에 시작한 일이지만 여태껏 제가 바텐더로 살게 만든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집에서도 좋은 술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술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세요. 그리고 도수가 아주 높은 아메리칸 위스키를 영화 속 주인공과 함께 마시면 정말 맛있습니다. 같은 술이라도 집에서 마시면 맛이 없다고 바에 술을 가져오는 손님이 더러 있어요. 그런 게 공간이 주는 힘이겠죠. 하지만 영화는 시공간을 초월하게 해주잖아요. 혼자든 연인과 함께든 술이 나오는 영화와 함께 즐겨보는 걸 추천해요. 그 중에서도 추천할 만한 것은 <매드맨Mad Men>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어요. 1편에서 주인공이 술을 마시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아, 지금 아메리칸 위스키가 있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곧 다가올 봄에 기슭에서 준비하는 재미있는 계획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요즘 등산을 즐기는 젊은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기슭 근처에 북한산이 있어서 등산객을 위한 하이킹 세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기슭에 들러 도시락과 논알코올 칵테일을 가지고 산에 오른 후에 하산길에 도시락을 반납하면 피로를 풀 수 있는 칵테일을 제공하는 구성이에요. 마치 산장처럼요.
1919
호텔 그라피 네주
1238
하우스 리터러시
1779
더 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