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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내음으로 물든 디자이너의 성북동 아틀리에

켈리타앤컴퍼니 최성희 대표

Text | Solhee Yoon
Photos | Hoon Shin
Film | Jaeyong Park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 짙어가는 산세의 녹음처럼 최성희 대표가 가꾸는 생각의 정원도 한창 초록을 살찌우고 있다. 어제와 다른 잎사귀가, 작년과 다른 풍경이 찾아드는 까닭에 그는 쉴 틈 없이 바쁘다고 했다. 보물이라고 내보이는 것들은 사실 내 베란다의 작은 화단에도 있었다. 그러니 그와의 대화 끝에 나의 식물이 달리 보일 수밖에.








분명 도심 한복판인데 교외로 훌쩍 떠나온 느낌이에요. 집 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제가 운영하는 켈리타앤컴퍼니의 아틀리에 겸 제가 사는 집입니다. 스튜디오는 도보로 3분 거리에 따로 있고요. 이곳에서는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정리합니다. 마당 이름도 생각의 정원이죠.








지금이 5월 하순인데, 정원에서 가장 활기를 띠는 식물은 무엇입니까?

사람으로 치면 모두 완연한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셈인데, 그중에서 꼽으라면 캐모마일이 한창이고요, 토종 식물인 당귀랑 둥굴레, 명이나물꽃도 씩씩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야채도 정말 예쁠 때죠. 4월에 씨를 뿌린 래디시가 한창 수확기를 맞았어요. 그 자리에서 뽑아 베어 먹어도, 얇게 슬라이스해 샐러드에 넣어 먹어도 그만이죠.



정원을 가꾸는 루틴이 있나요?

저는 하루를 세 파트로 나눠 지내요. 이른 아침에는 정원에 물을 주고 흙을 살펴요. 그런 다음 일종의 재택근무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점심을 챙겨 먹고 스튜디오로 출근해 팀원들과 회의하고 나머지 업무를 하지요.










언제부터 이러한 규칙을 따르고 있나요?

30대에 들어서면서 회사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두서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일만 하며 살았죠. 클라이언트를 위한 브랜딩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프레젠테이션의 완성도를 위해 밤새우는 일이 잦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새벽이었을 거예요. 문득 거울을 봤는데 제가 원하지 않는 눈빛과 표정이 보이더라고요. 아차 싶었어요. 누구를 위해서도, 무엇을 위해서도 이렇게 일하는 건 삶의 균형을 해치는 일이구나. 그때부터 일상과 비일상을 구분하고 삶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어떤 기준으로 구분했나요?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 쪽을 일상이라고 불렀어요. 그때는 책상 앞에서 일하는 것이 일상이고 전시를 보고 가드닝하고 여행 가는 걸 비일상이라고 했죠. 근데 이제는 바뀌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비일상이라고 선언했던 것들이 요즘에는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든든하게 제 일상을 이루고 있어요.








어릴 적부터 자연을 좋아했나요?

어릴 때 한옥에서 살았어요. 마당에 강아지와 고양이가 있었고 해가 지기 전에는 방에 들어가지 않았죠.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문방구에서 사 온 분필로 마당에 퍼질러 앉아 그림을 그리고, 물을 뿌리고 마를 동안 놀다가 다시 그리고 그랬대요.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집에서 학교를 걸어 다녔던 것도 자연과 가까이하는 데 한몫했어요. 겨울에는 동상에 걸리고 여름에는 그늘을 쫓아다니면서 사계절을 났죠. 그래서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가 저에겐 아주 익숙해요.



그 기억이 이렇게 마당 있는 집으로 이끈 걸까요? 이 집의 어떤 점이 좋았나요?

원체 공중에 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땅에 발을 디디고 살려고 하죠. 그리고 제겐 하늘이 잘 보이는 게 중요해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곳 티룸이나 드로잉실에 있으면 그야말로 창이 실시간 모니터예요. 벌이 찾아오고 나비가 찾아오고 새가 찾아오는 모습이 창밖으로 내다보이죠. 정원 한쪽의 물확에서 새가 목욕을 한 뒤 잔디에 누워 날개를 펴서 말리는 광경을 보면 한 편의 동화가 따로 없어요.




굉장히 지루한 할머니의 취미 공간처럼 보이지만 정원이야말로 창조의 바다예요.”




본인을 정원생활자라고 소개하시더라고요.

굉장히 지루한 할머니의 취미 공간처럼 보이지만 정원이야말로 창조의 바다예요. 백만 송이 꽃이 저마다 다르죠. 그걸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정원에는 그런 거 없어요. 모두가 원앤온리죠. 사실 정원은 100년 전, 1000년 전부터 하던 일을 할 뿐인데 우리가 까먹고 살다가 새삼 깨달음을 얻어요. 저는 그 순리를 알아가는 게 너무 좋아요. 제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친구들이 지금부터 땅 파면 늙어서 뭐 할래라며 놀렸는데 이제는 놀러 오고 싶다고 난리예요.








자연의 본질을, 속도를 알아가는 거네요.

사람이든 식물이든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자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이 정원에서 배워요. 제때 제자리에서 자기 숨의 속도로 자기 명을 다할 때까지 사는 게 제일 아름답고 멋있죠.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그것을 거스르려고 해요. 6월에 피는 꽃을 3월에 보려고 약을 주고 8월에 익는 수박을 12월에 먹기 위해 온실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그 존재를 귀하게 여기지 않죠. 어쩌면 우리는 제 욕심에 손해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제철에 먹는 수박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지를 누가 얼마나 알까요.








그런 생각이 브랜딩 일과도 자연스레 연결되겠군요.

서울공예박물관, 백미당, 피네이션, 빌리브 등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작업했어요. 저는 브랜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어떻게 시각화할지에 대한 힌트를 정원에서 찾아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하나하나 너무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요. 저마다 자기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모양이나 색이나 시각적으로도 유일하죠.








마치 우리네 모습 같기도 하네요. 빌리브가 담고 싶은 이야기도 그와 비슷해요. 다양한 삶에 대한 믿음 말이죠.

VILLIV라는 단순한 타이포에 녹색의 움직이는 이퀄라이저를 조합한 BI 디자인은 도시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 그리고 저마다의 삶의 리듬, 활력을 담는 장소란 메시지를 담은 제안이었어요. BI를 켈리타앤컴퍼니에서 작업한 지 벌써 4년이 흘렀네요. 참 좋다고 생각한 건 빌리브가 긴 호흡을 갖고 주거의 여러 의미를 다양한 감각으로 기록하며 대중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에요.








가드닝과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5월 말이면 종종 영국의 가든 투어에 가요. 세계적 가드너와 플로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문을 열지 않는 프라이빗 가든도 볼 수 있어요. 행사 기간이면 상점의 쇼윈도도 모두 식물을 테마로 꾸며 볼거리가 가득해요. 거기 가면 제가 늘 찾는 노부부 상인이 있어요. 1년 중 360일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원예 도구를 수집하고 딱 이 플라워 쇼 기간에만 장사해요. 그 부부의 보따리를 구경하며 세상사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즐겁죠.








요즘 서예를 배운다고요.

정기적으로 스승님과 나란히 앉아 글씨를 쓰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그림을 그리니까 붓을 놀릴 줄은 알아도 글씨를 쓰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에요. 운지법부터 글자에 담긴 메시지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써야 글이 돼요. 재미있어요. 한지도, 먹도 제가 좋아하는 천연의 것을 써요. 자연에서 왔고 자연으로 가는 것들이죠.



앞으로 생각의 정원에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요?

대형 캔버스를 10개쯤 설치해두고 번갈아 가며 조금씩 그려가는 것. 캔버스가 햇살을 받고 비도 맞으면서 바래고 상하겠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간을 담는 과정이 될 것 같아요.








이사를 생각한 적은 없나요?

세상에 유일무이한 식물과 제 생의 유일무이한 순간을 함께한 것만으로도 지금이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더 넓고 화려하고 스마트한 집이 있어도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니죠. 저는 100년 전에 태어났어도, 100년 후에 태어나도 이렇게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며 비슷하게 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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