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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밀라노에서 텃밭 가꾸는 디자이너

비주얼 디렉터 발렌티나 시우피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여성 디렉터 발렌티나 시우피를 주축으로 한 비주얼 스튜디오 베데트의 디자이너들은 텃밭을 돌보며 디자인 콘셉트를 정하고 복잡한 일정을 정리한다. 한가로운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얼마 전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푸오리 살로네 행사 중 10개의 전시를 소화한 상태다. 감각적인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이력이 독특해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비주얼 디렉터가 되었어요. 자신을 소개한다면요?

대학교에서 기호학을 전공한 후 디자인 잡지에서 10년 이상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어요. 그런데 10년 전부터 이탈리아 잡지 시장이 위기를 겪기 시작해 커리어 전환이 필요했죠. 기호학, 디자인, 네트워크를 무기 삼아 스튜디오 베데트를 설립했어요. 여기서 비주얼 및 총괄 디렉터를 맡고 있고 프로젝트에 따라 유동적으로 여러 디자이너들과 일해요. 디자인 전시장 알코바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고요. 스페이스 캐비어 멤버 조셉 그리마Joseph Grima와 함께 공간을 운영하고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어요.








전시 기획, 그래픽 디자인, 공간 디자인, 인터랙티브 디자인, 사진, 스타일링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와 전문가가 모인 창작 집단인 스튜디오 베데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오랫동안 미디어 그룹에서 디자인, 건축, 아트 관련 글을 쓰면서 '매일 만나는 이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기자 경험을 살려 을 짜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이는 바람에 시작된 거죠. 스튜디오 베데트는 항상 클라이언트의 관점과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그룹이에요.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는 구조로 자유롭게 일하고 기획에 따라 다른 디자인 언어를 사용하죠. 어떻게 보면 무색무취 창작 그룹이라 볼 수 있어요. 베데트vedèt는 베테타vedetta에서 유래한 말로 감시라는 뜻이 있어요. 넓은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이름 지었죠. 프랑스어로 ‘여배우’라는 뜻도 있는데, 제가 지휘봉을 들고 있으니 나름 의미가 통하죠.(웃음)










매년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에 참여하고 있어요. 올해 전시를 무려 10개나 했다고 들었어요.

로 피에라 전시장에서 열리는 전시를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라 하고, 같은 기간에 밀라노 중심지인 브레라 주변에서 열리는 이벤트를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라고 합니다. 푸오리 살로네는 밀라노 내 패션, 리빙, 가구 등 모든 디자인 관련 브랜드가 행사를 주최하는데, 매장이나 부스가 아닌 유서 깊은 저택, 정원, 갤러리, 공장 등 비밀스럽고 은밀한 장소에서 열리기에 더욱 창의적인 전시 풍경이 펼쳐지죠. 최근에는 푸오리 살로네에만 참석하는 브랜드가 늘었어요. 올해 저는 닐루파 갤러리에서 열린 파Far 프로젝트 크래프트마니아’, 쿠즈아크KoozArc, 트라메Trame, SEM, 올더Older 등 다양한 브랜드 전시에서 콘셉트 선정과 카피라이트, 로고, 책자, 웹사이트 개발까지 여러 가지 일에 참여했어요. 올해는 2년 만에 정식으로 열린 행사(코로나19로 지난 2년간 모든 관련 행사가 취소되었다)라 사람들의 기대가 높았고,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죠. 알코바에는 무려 90개 브랜드가 참여했어요. 4월에 정기적으로 열리던 행사와 달리 올해는 여름이 성큼 다가온 6월에 열려 사람들이 한층 들떠 보였어요. 전시보다 파티에 더 진심이었죠.




더 이상 ‘즐겨찾기’ 목록을 만들지 않아요. 끊임없이 변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실 그런 우연한 만남이 사건을 만드는 경우가 많죠.

맞아요. 이탈리아 디자이너들과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면 을 하지 말고 을 타야 해요. 파티와 이벤트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인간적인 교류를 하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일이든지 시작할 수 있어요.








일적으로 을 만들고 싶은 사람을 만났나요?

알코바에서 전시를 연 디자이너 막시밀리안 마르체사니Maximilian Marchesani가 인상적이었어요. 자연과 환경오염에 대한 깊은 연구로 이끌어낸 결과를 가구 디자인에 적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매년 이렇게 10개 가까이 되는 전시를 소화한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진행할 수 있나요?

여러 명의 디자이너와 일하려면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해요. 멤버 모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감 있게 작업하죠. 저는 그들에게 최대한 자율성과 권한을 넘깁니다. 오히려 거창한 시스템 아래 지휘자가 통제하기 시작하면 소통이 오해가 되고, 관리가 한계점을 만드는 꼴이 되어버려요. 멤버들이 각자의 호흡대로, 편한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되는 거죠.








주최자이면서도 트렌드를 수집하기 위해 전시장을 모두 둘러봤을 텐데요. 올해는 어떤 곳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나요?

여성 디자이너 미스키에프스Misschiefs,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아카데미, 전시장 자체가 아름다웠던 스파치오 마이오키Spazio Maiocchi로에베 Loewe가 그랬어요.



이런 전시장을 통해 발견한 트렌드 키워드가 있다면요?

새로운 재료에 대한 '연구(research)'와 환경과 사람을 위한 '재활용(recycling)'이 키워드가 될 것 같아요. 특히 '테크노크래프트techno-craft'라는 용어를 여러 전시장에서 봤는데, 첨단 기술과 핸드메이드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논의가 다양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의 일을 소화하려면 다양한 에너지가 필요할 것 같아요. 특별히 영감받는 분야가 있나요?

없다고도, 너무 많다고도 할 수 있어요. 몇 년 전까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이었고 아티스트는 프란시스 알리시스Francis Alyis, 영화감독은 팔로시니Palosini와 엘리오 페트리 Elio Petri 였죠.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즐겨찾기’ 목록을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취향도 일상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특히 스튜디오 멤버들과 다양한 일을 하면서 제 관심사가 한층 넓어졌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와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느 한 가지 주제, 매체, 인물에 집착하지 않고 물 흐르듯 정보를 읽고 받아들이려고 해요. 말 그대로 취향을 버리는 연습을 하는 거죠.



세상에서 가장 감각적인 사람들이 모여드는 밀라노에서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끊임없이 자극받고 소통하고 움직여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살다 보면 일상 그 자체가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도시, 사람, 관계 등 모든 네트워크가 늘 변화하기 때문에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파도 타듯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점점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밀라노를 찾는 이유입니다. 일부러 변화하겠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고 의식하지 않아요. 변화와 혁신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 정서, 유대감이라 생각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뛰어난 기술과 민첩한 정보력보다 작은 영감조차 자신의 것으로 융통성 있게 소화하고 사람들과 나누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공감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각자 방법은 다르겠지만 의식적으로 타인을 포용하고 돌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스튜디오를 찾을 때 실내보다 야외 공간이 넓은 곳을 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 동물, 사물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장소를 원한 것이죠. 텃밭 또한 식물을 가꾼다는 것 자체보다 생명을 함께 돌보고 서로 다른 생태계를 배운다는 의미가 있어요.



실내보다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들었어요.

복잡한 일일수록, 아이디어가 필요한 일일수록 밖으로 나오죠. 따사로운 볕을 받으면서 각자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고, 요리를 하는 등 그렇게 기분 전환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엉뚱한 발언들이 튀어나와요. 크리에이티브는 기술이나 재능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저는 협업이라고 생각해요.










이 공간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텃밭을 가꿀 때요.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피워낼 때 얼마나 흥분되는지 몰라요. 디자인 행사를 무사히 마쳤을 때보다 더 행복하죠. 삶의 섬세한 과정을 함께 관찰한다는 것이 단합과 협력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밀라노에서 평생 살았다고 들었어요. 밀라노라는 도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패션쇼, 리빙 페어, 아트 페어 등 행사가 있는 달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거든요. 최근 스튜디오가 자리한 놀로Nolo 지역에 디자이너 스튜디오가 여럿 생겨서 반가워요. 디자이너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바, 바소Bar Basso도 근처에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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