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간판도 없다. 골목을 향해 있는 큰 스피커 위로 촘촘히 채워진 CD장, 투명한 여닫이 창문 너머로 엿보이는 로스터기가 이곳이 카페임을 알리는 전부다. 그런데 벌써 마포구의 자랑이라고 할 정도로 소문이 났단다. 이유를 묻자 이규범 대표는 웃는다. “이렇다 할 게 없는걸요. 단지 저는 여기서 즐겁게,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여기도 제 삶의 일부니까요.”
대표, 로스터, 바리스타 중 어떤 호칭이 편해요? 여러 직함으로 불릴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규범 님’, 이렇게 불러주는 걸 좋아해요.
‘도덕과 규범’이라는 카페 이름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생겼어요. 카페 이름치고는 특이해요.
가게 운영은 이곳이 세 번째인데 이곳을 시작하기 전에, 언젠가 또 가게를 하면 ‘도덕과 규범’이라 이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가게를 상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가게를 내고 싶은 동네, 공간 생김새, 면적, 금액, 그리고 이름도 생각하고 있었죠.
가게 이름에 왜 ‘도덕’이 들어갔을까요?
제 이름만 쓰기에는 뭔가 심심한 것 같아서 제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더해 만들었어요. 친구들은 한사코 말렸지만 전 그래도 괜찮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니까.
“이곳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13㎡짜리 커피숍치고는 굉장히 큰 꿈이지만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 번째 가게라고 했잖아요. 이곳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지금보다 훨씬 넉넉한 크기로 첫 가게를 시작했고, 두 번째에는 그 면적의 절반, 세 번째에는 다시 그 절반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이곳을 찾았어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월세를 줄여 매출에 대한 부담을 낮추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어요. 지금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라테 세 종류로만 메뉴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또한 월세가 저렴해서죠. '이렇게도 할 수 있어?'라는 반응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이곳은 이전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요?
출판사에서 책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대요. 지금도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러고 보니 13㎡(4평) 남짓한 공간에 로스터기까지, 작지만 진짜 있을 건 다 있네요.
이곳을 계약하고 나서 도면만 수십 번 그리고 고쳤어요. 로스터기는 ‘이곳은 직접 원두 로스팅을 하는 곳’임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것이라 바깥에서 잘 보이면서, 제연기 등 다른 설비 설치에 무리가 없도록 위치를 잡기까지 까다로웠어요. 여유 면적이 없으니까 5cm 정도만 잘못 배치해도 냉장고 문이 안 열리거나 다른 선반이 들어가지 못했거든요. 말하자면 입체 테트리스를 한 거예요. 다행히 모든 장비를 수용했고, 거기서 나아가 공연도 하고 팝업 행사도 열고 있죠.
인테리어도 직접 했나요?
네. 가게를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 퇴점할 때 폐기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저는 그게 늘 속상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폐기물을 제로로, 쓰레기를 최소로 줄이겠다는 목표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용도를 잃겠다 싶은 건 애초에 들여놓지 않았어요. 훗날 이사 갈 때 가져가서 계속 쓸 수 있는 걸로만 들였죠.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인데,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할까요. 신수동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가더라도 또 한 번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자 생김새가 제각각인 이유도 그 때문인가요?
맞아요. 지금 앉아 계신 의자는 어머니 화장대 의자였어요. 그 옆에 있는 의자는 제가 어릴 때 쓰던 피아노 의자고요. 그렇게 다들 어디선가 쓰이다가 잠시 용도를 잃었다가 이곳으로 온 거예요. 새것 안 사고 최대한 있는 거 잘 쓰려고 노력합니다. 근데 커피 장비는 욕심이 나서 새것을 사긴 해요.
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공간이나 물체 크기를 휴먼 스케일이라고 하잖아요. 말하자면 이곳은 ‘규범 스케일’인 셈이네요.
맞아요!(웃음) 제가 편안하게 느끼는 최적인 공간이에요. 그래서 쉬는 날에도 가게에 나와요. 퇴근하고 집에 갔다가도 다시 와서 노래 틀어놓고 이것저것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요. 여기서 무엇을 바꾸면 더 편리해질까, 재미있어질까 고민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 별게 아닌데 굉장히 하고 싶은 게 생겨요. 카운터에 달아놓은 오틀리 박스 조명이 그랬어요. 매장 오픈할 때 선물받은 오틀리(귀리 음료 브랜드) 박스로 만들었어요. 저희가 또 오틀리를 사용하니까 손님들한테 알리는 기능도 할 것 같고요. 이렇게 생각하고 추진하고 실행할 때 엄청 즐거워요.
이따금 열리는 행사도 그런 즉흥 계획의 연장선이겠군요.
손님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이 생겨요. 어느 날 한 단골손님이 자기가 글 쓰는 사람인데 신수동과 도덕과 규범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단편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김후란 작가였어요. “좋아요, 한번 해볼까요?”라고 했더니 그다음 날 초고를 보여주셨어요. 이렇게 단편소설 <모토는 모데라토>란 책이 탄생했어요. 마침 그 발간 시기에 옆집 방레코드 방우현 대표가 번역에 참여한 책도 나왔대요. 제목이 <블루노트 컬렉터를 위한 지침>이라 블루노트 음반을 듣고 이야기 나누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도덕과 문학과 규범’이란 이름으로 책을 낭독하고 음악을 듣는 행사를 가졌죠. 매사가 이런 식으로 벌어져요.
‘일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중요시한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바로 이런 거군요.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며 겨우 좋아하는 것을 찾았는데 ‘좋아해도 일이 되면 힘들다’는 말처럼 되긴 싫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보내는 시간도 삶이라 정했어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이 제게는 안 맞아요. 저는 다 삶이에요. 여기서 보내는 시간도 삶, 제 개인적인 시간도 삶이죠. 일터도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더 중요해지죠.
커피는 왜 좋았어요?
커피를 처음 배우면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근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할수록 어렵고 알수록 모르겠어요. 저는 쉽게 싫증을 느끼는 편인데 커피에는 그런 마음이 안 들어요. 더 잘하고 싶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겨요. 사실 뒤에서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웃음) 또 커피를 통해 생기는 일이 좋고, 그것으로 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요.
무엇을 하고 싶은데요?
제가 인디 밴드 보컬로 활동하면서도 느끼는 건데, 저는 음악을 통해 위로받고 또 위로할 때 가장 행복해지는 사람이에요. 음악이 완성되는 순간은 듣는 사람에게 어떠한 울림을 주었을 때라고 믿죠. 커피도 마찬가지예요. 커피 한잔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어요. 커피가 간절히 필요한 누군가가 제가 내린 커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도덕과 규범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곳이면 좋겠고, 이곳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13㎡짜리 커피숍치고는 굉장히 큰 꿈이지만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신수동 주민도, 다른 동네 주민도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네요.
그렇다면 감사하죠.(웃음)
여름인데 휴가 계획이 있나요?
제가 도덕과 규범을 열면서 만든 나름의 ‘규범’이 있어요. 직장인처럼 주 5일 근무하자. 직장인보다 조금 짧게 일하자. 그리고 대학생처럼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갖자. 그래서 1년 중 10개월만 일해요. 물론 쉬면 모아둔 돈을 써야 하고, 때로는 일정이 꼬이기도 해요. 근데 저는 그렇게 지내고 싶어서 큰 문제 없으면 8월에 2주 이상, 한 달 가까이 방학처럼 쉬려고요.
와, 너무 멋진 ‘규범’이네요!
근데 고백하자면, 보시면 알겠지만 여름이나 겨울에 사람들이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실내에는 자리가 3개밖에 없어 골목에 서서 드시는 손님이 많은데,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잖아요. 그래서 손님이 정말 많이 줄어요. 그런 이유로 비참해지느니 차라리 멋지게 쉬는 걸로 노선을 정했습니다.(웃음) 방학에 잘 쉬면 다시 가게를 열었을 때 하고 싶은 게 또 많아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