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동네를 먼저 골랐어요. 건물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이고요.” 일상 속 작은 여행에 진심인 최재원 대표의 눈에 정릉은 안성맞춤이었다. 한양도성에 인접해 조선 시대부터 사대부의 별장 터로 사랑받던 동네였으니까 말이다. 최재원 대표는 이곳이야말로 ‘조선의 리트릿 중심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여기에 이너시티란 라운지를 만들고, 자신을 발굴하려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고 응원한다.
이곳이 이너시티 맞나요? 그 뜻이 궁금해요.
‘내 안에 있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직관적이죠.(웃음) 보통 우리는 바깥을 보고 살잖아요. ‘직장 동료와의 관계’, ‘월 1000만 원 버는 부업’ 같은 데 관심을 오래, 많이 쏟죠. 물론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바깥을 오래 보면 결국 지치게 되더라고요. 내 안에 없는 것을 자꾸 좇다 보니까 마음이 황폐해져요. 우리가 애써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 소중한 것은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나의 내면 도시를 기억하고, 자주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이너시티’라고 이름 지었어요.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이야기는 흔히 듣지만, 우리 내면에 도시가 있고 그것을 가꿔야 한다는 말은 낯설어요. 그래서 신기하고요. 그것을 가꾸는 방법이 뭔가요?
휴식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까 진정한 휴식은 내 안의 나와 오롯이 연결되어 있을 때 이뤄지더라고요. 그 연결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에요.
본인은 언제 질문을 시작했나요?
30대 초반에 내가 가진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다음에 시작했어요. 돌이켜보면 그제야 밖에서 답을 찾고 나를 채우려고 애쓰던 것을 멈췄던 것 같아요. 물론 20대 때는 체력도 좋고 활기찼죠. 내 안의 빛을 내뿜으면서 반짝반짝하게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내 안의 빛을 밝히는 것보다 남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걸 좇고 있더라고요. 물론 그걸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예를 들면 어떤 것이요?
대기업 입사, 고액 연봉, 이런 거 있잖아요. 사회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주는 걸 저 역시 바랐던 것 같아요. 운 좋게 이뤘던 적도 있고 좌절했던 적도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매일 야근하고 체력이 다해 배터리가 깜빡깜빡 꺼질 때쯤 집에 와서 겨우 잠만 자고 다시 출근하는 삶이었죠. 피곤했어요. 뭐 빛나고 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 쳇바퀴 생활을 벗어나려고 해도 그럴 힘이 전혀 없었죠.
“한 번 긴 여행을 가는 것보다 작은 일상의 행운을 자주 발견하는 게 훨씬 더 행복하더라고요.”
그때 시도한 게 무엇이었나요?
뜨거운 물에 녹는 설탕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쯤 시도해본 게 있어요. 멀리 나갈 에너지도, 시간도, 비용도 없으니까 바로 옆 동네로 여행 가기. 집이 합정동인데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연남동에 1박 2일간 숙소를 예약했어요. 말이 안 되죠. 그런데 혼자 주문을 걸어요. 이 문고리를 잡고 나가는 순간 ‘나는 여행자다!’ 하고요.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거리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사람들 표정이 보인다는 뜻이죠. 또 음식점 사장님한테 말을 걸게 돼요. “저 오늘 여행 왔는데 무엇을 먹어보면 좋을까요?” 그러면 평소에는 “닭꼬치 하나 주세요” 하고 스마트폰에 고개를 떨궜을 제가 사장님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고 있고요.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은 여행’의 시작이었군요.
맞아요. 이렇듯 일상에서 한숨 돌리듯 하는 여행이 저의 유일한 해방구였어요. ‘관점 여행’, ‘페이크 트래블’ 등으로 부르다가 ‘작은 여행’이란 표현을 찾았고요. 저는 한 번 긴 여행을 가는 것보다 작은 일상의 행운을 자주 발견하는 게 훨씬 더 행복하더라고요. 그게 지금 정릉에 이너시티를 만든 배경이에요.
이너시티를 ‘오두막’이라고도 부르던데요. 오래된 목조 주택이기 때문일까요?
규모가 작고 여느 라운지처럼 휘황찬란한 것도 아니지만 누구든 잠시 머물며 앉든 눕든 자든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라 ‘오두막’이란 말이 입에 붙었어요. 물론 목조 주택의 멋도 있죠. 건축물대장에는 1950년대에 지었다고 하지만, 동네 어르신들께 들은 바로는 1930년대부터 있었대요. 이 집과 붙어 있는 바로 옆집, 뒷집이 1930년대에 지었거든요. 여기 수선할 때 직접 공사했는데 벽지를 한 겹 떼면 오래된 신문이 나오고, 두 겹 떼면 대나무가 나오고, 심지어 갈대도 있었어요. 두 번은 못 할 만큼 어려운 공사였지만 건물이 살아온 세월을 발굴하는 건 신기했어요.
바로 옆에 정릉천, 정릉시장이 있던데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났어요. 동네 분위기는 어떤가요?
정릉천 따라 이곳저곳 걷다 보면 조선 시대에 별장 터였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이 곳곳에 보일 정도로 경치 좋고 물 좋은 동네예요. 오래된 주거지라 정릉 토박이 어르신도 많아요. 그분들은 저기 3대째 운영하는 고깃집에 새 고기가 들어오는 날, 시장통 횟집에 가을 전어 들어오는 날까지 훤히 알죠. 화분을 들고 골목을 걷잖아요? 정말로 5m마다 한 분씩 다가와서 말을 걸어요. “왜 이렇게 시들었어? 우리 집에 데려와.” 사는 맛이 있어요. 재미있어요.
이너시티에는 어떤 분들이 머물다 가나요?
명상하는 사람, 요가하는 사람, 환경 운동하는 사람, 혹은 이걸 전부 다 하는 사람들이 와요. 의도한 게 아닌데 자연스레 자신을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여기서 만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무용해 보일지라도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걸 기꺼이 좇는 사람들이라 저도 많이 배워요.
이너시티를 찾는 여행객은 대화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고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요?
‘고요’와 ‘대화’ 두 가지 모드 중 선택할 수 있어요. 대화를 선택하는 분들은 서로를 연결해 드리기도 하고, 산장지기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요. 그럴 때 저는 주로 잘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살다 보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 같다가도 굉장히 쉽게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이 오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텨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점점 감정을 꺼내는 게 어렵고 버거워지고 방법을 모르겠고, 그러면서 번아웃을 겪게 되거든요. 물론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두려움을 아주 살짝 꺼내기만 하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돼요. 모두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산장지기는 안전하게 말문을 트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그러고는 온전히 들어주죠. 낯선 질문과 대화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게 돼요. 그리고 타인과의 연결감 속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기도 해요. 나아가 내가 틀린 게 아니라는 데에서 안정감을 찾으면 좋겠어요. 첫 질문은 보통 대화 카드를 늘어놓는 걸로 시작하죠.
라이프쉐어가 제작·개발한 대화 카드에는 나, 사랑, 가치, 미래 등 다양한 테마가 있고 질문이 다르게 적혀 있더라고요. ‘지금 그대로 지키고 싶은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최고의 사랑은 노력일까요, 인연일까요?’ 같은 내용이요. 이토록 질문을 중요한 도구로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질문의 기준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질문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건 아니거든요. 유명하다는 게시판을 보면 질문으로 가득해요. 그런데 내용이 대부분 이런 식이더라고요. ‘이성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이 코디가 잘 어울리나요?’, ‘35세, 인서울 졸업했고 이 정도 연봉 괜찮나요?’ 또 유튜브에는 이런 콘텐츠가 정말 많죠. ‘연봉 1억, 이대로만 하세요’, ‘노후 준비 이걸로 끝’, ‘상위 1% 남성을 만나는 비법’, ‘다른 것 찾아보지 마세요, 이게 정답입니다’.
많이 본 제목들이에요.
저는 이 숱한 질문과 답이 정말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지를 먼저 질문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정답을 따라가야 하는 질문 말고 내면을 따라가야 하는 질문을 우리 먼저 해보자고요.
예를 들어줄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감정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좋아해요. 예를 들면 ‘기분이 왜 안 좋아?’, ‘그게 왜 기분을 안 좋게 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려고 해요. 사실 쉽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게 얼마나 어려워요. 방어기제는 누구에게나 있는걸요. 그래서 이 질문을 할 때 저도 어렵지만, 그래도 이 과정이 저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시도해요. 또 부정적인 감정과 이유에만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질문을 함께 하려고 해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길 바라지?’, ‘그렇게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이런 질문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질문할 때의 자세예요. 자신을 비난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결국 내가 나를 잘 운영하고자 스스로 자신의 호스트가 되어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한 의도임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제일 좋아하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내 안에 어떤 두려움이 있는가? 나는 그 두려움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그 두려움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게 저의 이너시티를 열어주는 질문이에요.
질문이 너무 매운걸요.
위스키를 즐겨 마시다 보면 점점 더 깊고 오묘한 맛을 찾아가듯이 질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웃음)
마지막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본인의 내면 도시는 잘 크고 있나요?
여전히 가꾸는 데 서툴러요. 그래서 저의 도시가 잘 지어지고 잘 크고 있느냐는 질문에 확답을 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요. 이 도시가 제 안에 있고, 그 도시를 잊지 않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어요. 저의 이너시티는 깔끔하지 않아요. 흙바닥의 오두막같이 생겼죠. 그래도 좋아요. 내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고 느낄 때, 무언가에 휩쓸릴 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이 도시에 가려고 합니다.
1883
호텔 그라피 네주
1223
하우스 리터러시
1761
더 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