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고은은 동네를 산책하며 무언가를 모으는 데 진심인 디자이너다. 여기서 말하는 ‘무언가’란 낡은 간판 속 글자뿐만 아니라 옛 지명, 이제는 철거되고 사라진 건축물, 때로는 토박이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의 보물 상자 같은 작업실에 다녀왔다. 아직 비어 있는 내 상자에 수집력의 불씨를 지필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오래된 건물, 오래된 동네에서 발견한 무엇은 어떠한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가.
박고은 디자이너 본인이 직접 작업실을 계약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이전에는 어디에서 일했어요?
독립하자마자 바로 작업실을 계약하는 건 여러모로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이라 이제까지 동료 작업실에서 자리를 빌려 쓰는 식으로 지냈어요. 그러다 마침 작업실을 구하려는 또 다른 동료가 있어 욕심을 내어 함께 이곳을 임대했지요. 지난 늦여름에 입주했어요.
그럼 두 분이 말을 맞춘 작업실 조건이 있었겠네요?
깨끗한 신축보다는 사람 손이 탄 건물로 구하자고 정했어요. 조금 자세히 말하면 시간의 흔적이 묻은 건물을 찾아내서 먼지만 털어내고 잘 사용하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손이 탄 건물이란 표현이 재미있네요. 보통 신축을 선호하지 않나요?
유년 시절에 신도시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서울의 오래된 동네 느낌을 좋아해요. 저희 집은 여러 번 이사했어도 거의 평촌, 분당 등지를 벗어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서울에 있는 다양한 폭의 골목, 길가에 나와 있는 화분, 한동네에 오래 살고 계신 듯한 토박이 어르신들에게 자꾸 눈이 갔던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저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늘 그런 동네로 향하게 돼요. 바로 직전에는 연남동, 그 전에는 서촌에 작업실이 있었어요. 이번에도 시간이 쌓인 동네를 찾았고, 그 지표가 손이 탄 건물이었죠.
“다양한 세대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누적되기를 바라며 물음을 던져보는 것이에요.”
동교동은 왜 좋았어요?
홍대입구역을 지나가던 중 불현듯 부동산 앱을 켰는데 도로 이름에 쓰인 ‘경의선 책거리’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편집 디자인 일도 하니까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죠. 지도를 요리조리 돌려 보다가 이 건물을 발견했는데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계약했어요. 인테리어는 최소화했어요. 전 임대인이 쓰던 가벽을 헐어 공간을 틔우고 베란다 문 교체, 조명 설치, 벽 페인트칠 정도만 했어요. 가구도 많이 들여놓지 않고, 필요한 지점에 책장을 두어 공간을 구분했어요. 창문이 큰 편이고 빛도 잘 들어 창가에 식물을 여러 개 두었는데 어떤가요? 예쁘지 않나요?(웃음)
마침 오후 햇살을 받아 식물이 빛나는 것 같아요! 근데 경의선 책거리는 어떤 곳이에요?
출판사, 인쇄소, 독립 서점 등이 밀집해 있어서 붙인 이름이래요. 이 동네에는 곳곳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어요. 속지가 누렇게 바랜 옛날 책을 싸게는 5,0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데, 서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주제의 책이 많아요. 저는 책을 한 권 한 권 뽑아 들고 ‘이때는 이런 글자체를 사용했네, 이렇게 조판을 했네’ 하며 관찰하기를 좋아해서 헌책방을 자주 가요.
그렇게 헌책방에서 발견해 구매한 책이 있다면 하나 소개해주세요.
동교동은 아니고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산 책이 있는데, 1993년에 발행한 <한국의 名木(명목)>이에요. 제가 원래 나무를 좋아해서 딱 시선이 꽂혔던 것 같아요. 전국 곳곳에 있는 고목의 사진과 설명이 담겨 있는데,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무들이 그 자리에 있는지 궁금해서 2024년에는 그 나무들을 하나씩 찾아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도 박고은 디자이너의 첫 저서 <사라진 근대건축>도 그러한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정권기와 관련된 서울의 사라진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죠. 그 시작에 어떤 호기심이 있었나요?
어느 날 서촌 골목길을 걷다가 만난 카페 ‘푸른 양귀비’가 시작점인 것 같아요. 서촌에 작업실이 있을 때 카페 이름이 독특하고, 또 가로 폭이 길쭉한 건물 형태가 특이해서 볼 때마다 ‘꼭 한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었어요. 실제로 실내에 들어가보니 커다란 암석에 건물 한쪽이 기대어 있는 형세더라고요. 벽 하나가 진짜 암석이었어요. 커피를 홀짝이며 ‘이 건물은 언제 생겼을까, 누가 디자인했을까’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봤어요. 그러다 한 블로그에서 ‘1900년대 초 가장 사치스러운 건물로 소문난 벽수산장을 짓던 인부들이 지내던 숙소’란 글귀를 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벽수산장은 무슨 건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고, 그 시기 서촌의 이야기 조각을 맞춰가기 시작했어요.
그럴 수 있어요. 1973년에 철거되었거든요. 벽수산장의 마지막 용도는 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엉컹크) 사무실이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서촌 토박이 어르신이 어느 길을 ‘엉컹크 길’이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건물은 사라졌는데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때 사라진 건물이나 그 이야기를 수집해서 ‘이런 사실이 있었대’라고 말해주는 재미를 느낀 것이죠.
‘어라!’ 하며 호기심이 발동하고, 그것이 이렇게 수집하고 싶은 대상에 관한 단서로 이어진 셈이네요.
맞아요. 저의 경우에 푸른 양귀비와 벽수산장이 바로 그것이었죠. 덕분에 사라진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고, 마침 제가 모으고 싶었던 것, 말하자면 ‘지금은 사라진 공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란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사라진 것에 대한 이야기가 그토록 흥미로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한국 친구가 놀러 온 적이 있었어요. 한 레스토랑에서 둘이 밥을 먹는데 친구가 이렇게 말했어요. 이 동네는 카페를 가도 레스토랑을 가도 청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까지 다 섞여 있는 게 신기하다고, 한국이랑 참 다르다고. 듣고 보니 우리나라, 특히 서울은 서로 다른 세대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한참 부족한 것 같았어요. 이건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나눌 이야깃거리가 부족하다는 현상으로 이어지고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다양한 세대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누적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옛 건물을 아껴두고 지켜보면 어떨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려는 것 같아요. ‘이 골목에 있는 이 건물을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쓰고, 지금은 이런 사람들이 쓰고 있네’ 하고 이야기하고 추억할 수 있다면 이 도시도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요?
2023년에 흥미롭게 수집한 게 또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제작 지원을 받아 <글자를 입은 소리들이 모인 지도>를 제작했어요. 토박이 주민들만 어렴풋이 ‘어렸을 때 들어본 것 같다’고 할 만한, 광주에서 오래전 불리다 사라진 지명들을 재료로 한 작품이었어요.
관련 자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나요?
찾아보면 선행 연구 자료가 많아요. 한글학회에서 1966년부터 1986년까지 지역별로 지명을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 발행한 책 <한국지명총람>, 그리고 한국지명학회나 한국지도학회 연구 자료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한 수집을 자신의 일로 키워가는 과정이 건강하고 재미있어 보여요.
제가 관심을 갖는 디자인 작업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수집해 이를 재료로 잘 닦아내는 것이에요. 특별하게 꾸미지 않고, 이걸 몰랐던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표면을 드러내는 것, 나아가 조금 더 보기 좋게 배열해 이야기의 맥락을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싶어요.
이토록 데이터 수집력이 뛰어나고 또 소장 욕구도 있는데, 작업실은 여백이 많고 단순한 편이네요?
어쩌다 보니 손에 잡히지 않는 데이터에 더 눈과 마음이 가네요.(웃음) 최대 5명이 함께 쓸 요량으로 구한 공간이고, 또 함께 공간을 쓰는 다른 디자이너와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취향을 공유하다 보니 조금 의도적이긴 한데요. 일부러 더욱더 군더더기 없는 차가운 느낌의 사무 공간처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함께 작업실을 구한 유지연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철제 테이블에 은색 아연 소재 수납장을 선택했어요. 물질에 관한 저의 소소한 수집을 꼽는다면 식물 정도랄까요.
맞아요! 아까 나무를 좋아한다고 했죠?
네. 최근에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집 꾸미기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어요. 화분을 하나 사도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를 수 있으니까 좋더라고요. 화분 하나하나의 형태와 비율까지 스스로 고민해서 선택해 집에 둘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무엇을 키우느냐 하면, 키우기 좀 어려운 식물인데 잎 모양이 독특한 아랄리아, 괴근 식물인 파키포디움을 돌보고 있답니다.
2024년에는 어떤 계획이 있나요?
그 책 속의 고목을 보러 가는 것 외에 별다른 계획은 없지만, 2024년에도 이렇듯 도시 속에 가려진 이야기를 수집하는 일을 계속할 것 같아요. 다만 직접 조사하기보다는 전문 연구자와의 협업을 바라고 있어요. 만약 양질의 깊이 있는 리서치를 같이 할 수 있다면 제가 좀 더 자료를 다듬는 과정에 시간을 쏟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협업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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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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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조너선 도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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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나보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