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가까이서 보면 속이 비었는데, 그 소재가 몹시 궁금하다. 김지선 작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에 열을 가해 발생하는 비정형 형태를 주로 활용한다. 작업 형태가 정해진 게 아닌, 공간의 특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해 모든 작업이 같은 듯 다르다. 인공 공간 속 자연적 형태,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김지선 작가는 언제 처음 비닐을 소재로 작업하게 됐나요?
대학 졸업 후 공간 디자인 회사를 다니다 영국에 유학을 갔어요. 당시 수업의 일환이긴 했는데,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가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때 사용한 소재 중 검은색 비닐하우스 차광막이 있었고요. 이를 몰드 삼아 가구를 만들면서 플라스틱 소재의 특성을 경험했어요. 지금 주로 사용하는 비닐 역시 비슷한 성분이기 때문에 소재로 사용하는 데 익숙했던 것 같아요.
테이블 위에 놓을 정도의 작은 형태부터 대형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큰 형태까지 작업 규모의 제한이 없어 보여요.
천을 계속 이어 붙이면 커지듯 비닐도 제가 원하는 만큼 커지는 확장성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 제 작업은 옷 만드는 방식과 유사한 것 같아요. 원단에서 플라스틱으로, 형태를 짜는 소재만 바뀐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장점도 있고요. 저에게는 그런 지점이 새롭게 느껴져요.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차이라고 할까요. 어떤 소재를 선택했을 때 활용 방식이 한눈에 드러나는 것은 지양하려고 해요. 답이 너무 뻔하니까. 저에게는 일종의 실험이자 모험이죠. 가끔은 무모한가 싶기도 하지만요. 유학 당시에도 그런 방향을 설정했다가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학기 전체를 낭비하는 게 될 수 있으니까요.(웃음) 그래도 뭔가를 감수하고 싶었어요.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즈 어워드(LCMA) 2021 파이널리스트 수상작 / Photos: Lexus
이솝 삼청점 인스톨레이션 작업 ‘Kyklos’ / Photos: Aesop
삼성전자 인스톨레이션 작업 ‘The Wave’ / Photos: SAMSUNG
한식당 ‘덕분’ 몬드리안 호텔점 인스톨레이션 작업 'Aether' / Photos: 최용준
MUE 청담점 인스톨레이션 작업 'Spring Breeze' / Photos: 김지선
김지선 작가는 졸업 후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건축주, 발주처 등이 있는 일이었고, 현실적으로 한계와 제한이 명확한 일을 하며 번아웃이 왔다. 잠시 일을 쉬고 영국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큰 규모의 공간이 아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가구, 제품 디자인을 하며 머리와 마음을 환기시키려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다양한 현장을 방문하고, 여러 소재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끼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새로운 적성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여러 사람이 의견을 나누고 서로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고받는 워크숍 문화 또한 그녀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관련 종사자들과 자신의 의문, 결정, 변화에 대한 가감 없는 대화와 조언을 통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자신만의 방식’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김지선 작가는 ‘라운드Round’라는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작가라는 직업 특성상 개인의 의지와 역할이 크지만 향후 파트너, 어시스턴트 등 함께하는 이들이 크루(동료)로서 같이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작품 활동뿐 아니라 교육, 브랜드 등 또 다른 역할까지 담아내기를 바라는 것은 인터뷰어의 욕심일까.
현재 굵직한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매력적인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그녀에게 한 공모전은 적지 않은 전환점이 되었다. 렉서스 코리아가 주최한 것으로, 이전에 보지 못한 표현 방법을 통해 파이널리스트로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어워드는 응모 후 시상으로 끝나는 일반 공모전과 달리 파이널리스트 선정 후 한 달여간 각 분야 멘토들과 함께 멘토링 과정을 거쳐 상품화까지 이어지는 방식이다. 작가는 덕분에 상품 개발과 출시에 대한 과정까지 경험을 하게 된다.
국내 공모전 수상이 작가 개인으로서 큰 전환점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렉서스 코리아가 2021년에 주최한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즈 어워드(LCMA) 2021'에서 4명의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됐어요. 당시 주제가 ‘비저너리Visionary’였는데, 기존 공예와 달리 소재와 도구, 작업 방법 등을 새롭게 시도하자는 취지였어요. 저는 비닐을 가공해 만든 화병으로 수상했죠. 이 공모전이 제게 의미 있는 것은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당시 작가로서 더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에요. 특히 어워드 이후 좋은 브랜드들과의 협업이 이어진 것도 그 덕분이고요. 현재 제 시그너처인 비닐을 가공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소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어요. 저에게는 어떤 공간이나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이기 때문이에요.
기억에 남는 작업 몇 가지만 소개해주세요.
이솝의 삼청동 매장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진행했어요. 이솝은 3개의 매장에 지속 가능성을 테마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중 삼청점을 제가 맡은 거예요. 그 밖에 삼성전자와의 협업도 기억에 남아요. 삼성전자의 경우 지속 가능성을 넘어 ‘순환’이라는 큰 주제로 접근했어요. 에어컨이나 냉장고를 주문하면 제품 포장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엄청나잖아요. 보통 배송 기사가 수거해 가는데, 저는 그 비닐과 폐어망을 같이 엮어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용법, 주의할 사항 등등 비닐에 프린팅돼 있는 정보가 작품에 그대로 노출됐는데, 그러한 모습이 더 효과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고 봤어요. 굳이 ‘지속 가능성’이나 ‘친환경’이라는 콘셉트를 드러내지 않아도 보는 이가 직관적으로 느끼니까요.
김지선 작가는 지난해 9월 27일부터 10월 23일까지 델픽 안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를 기획한 시스터후드는 전시명을 <연금술적 수사학>이라고 붙였다. 금을 만드는 방법인 연금술에 빗댄 것이 흥미로운데, 작가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술가의 손으로 대상을 변형시켜 본래의 물질성을 완전히 탈피한다는 점에서 마치 연금술과 닮았습니다.” 금속을 금으로 바꾸었듯 비닐을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김지선 작가의 작업 특징을 담은 것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폐기물에 대한 관심으로 버려진 소재들을 활용한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쳐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주력하고 있는 비닐을 활용한 ‘폴리 시리즈Poly Series’의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선보입니다. 본 전시를 통해 테크놀로지의 산물이 마치 연금술처럼 예술적 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마법과 같은 예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시 서문에 적힌 글을 통해 이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전시를 연 델픽 안국은 한옥이 많은 동네의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브랜드 철학이 담긴 차를 중심으로 한 카페와 자사 상품을 소개하는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한다. 김지선 작가의 작품은 실내와 건물 옥상의 별도 공간에 전시했다. 특히 옥상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곳이기에 김지선 작가의 작품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시 장소 선정에 작가의 의사를 적극 반영했다고 한다. 이곳을 정한 이유는 주변의 오래된 한옥과 모던한 전시장 건물의 조화 등 공간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본인의 방식을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의뢰받은 공간에 이미 정해진 조형물을 넣는 것이 아닌, 공간의 특성, 스토리, 주변과의 관계 등등 다양한 시간과 이야기를 작업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한 의도치 않은 자연스러움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아름다움을 작가는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델픽 안국에서 연 개인전 <연금술적 수사학> 설치 작업 / Photos: 이정우
개인전은 어땠나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죠. 계동이라는 동네의 특성이 작업에 대한 영감을 주었는데, 전시장 주변으로 가득한 한옥이 어떻게 보면 제 작업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예비 장소 중 한옥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한옥 내부는 목재와 장식 등 지나치게 요소가 많아 복잡하고, 반면에 갤러리 같은 화이트 큐브는 주변과의 조화를 작업에 담으려는 제 취지와 맞지 않았어요. 장소의 의외성이 있었으면 했던 것이죠. 저에게는 장소의 의미가 남다르기에 전시 공간을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그 선택이 전시의 흐름과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공간에 대한 기준도 남다를 것 같은데요.
공간만 보고도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성향, 성격의 사람인지 느껴지는 곳을 좋아해요. 어떤 사람이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곳. 뭔가 본인에게 편하고 자연스러운 행동과 행태가 쌓여 그런 모습이 됐을 테니까요. 아무리 귀하고 비싼 물건이 많아도 사용자가 보이지 않는 곳은 매력적이지 않아요. 집 위치도 그중 하나죠. 소소한 가게를 좋아하면 그런 곳이 많이 있는 동네에 산다든가 풀, 나무를 좋아하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공원 주변에 있는 집에 산다든가 말이에요.
“공간이란 머무는 사람, 행위, 흐르는 공기와 빛 같은 무형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며 완성되는 것이죠.”
개인으로서, 작가로서 ‘자연스러움’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으로 알아요.
제가 자연스러움을 좋아하고, 그 단어에 유난히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예컨대 비닐뿐 아니라 금속, 자기, 목재 등등 다양한 소재를 시험하고 시도하며 나에게 맞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중 비닐에 끌린 이유는 그것이 열을 받아 녹아들어갈 때 나타나는 조합, 문양, 색감은 그 소재의 특성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움이라고 봤기 때문이에요. 제가 큰 방향을 잡아나가지만 그 디테일한 결과는 의도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는 영역이죠. 실제 제작을 하며 드러나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을 발견하는 것이 너무 재밌어요. 그 소재가 자신의 성질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비닐과 제가 같이 만들어가는 합작인 느낌이죠. 물론 그런 숨겨진 아름다움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겠죠. 앞으로 더 연구하고 노력할 부분이기도 하고요.
작가가 말한 자연스러움을 통한 아름다움은 작가의 공간에 대한 관점과도 이어지는 듯합니다.
결국 공간이라는 것이 그저 물리적으로 바닥, 벽, 천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안에 머무는 사람, 행위, 흐르는 공기와 빛 같은 무형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며 완성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제 작업도 공간을 만드는 과정과 닮아 있어요. 한 작품을 진행할 때 수많은 요소를 고려합니다. 작품을 설치할 곳의 빛과 이를 보는 사람들의 동선 그리고 바람 같은 공간에 영향을 줄 자연현상까지도 말이에요. 저에게 좋은 공간과 좋은 작업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흐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Text | CH
Photos | Est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