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 숍들이 옹기종기 모인 파리 베르뇌유 거리 한복판에 머스터드 옐로 컬러 외벽이 단번에 시선을 끄는 공간, 아로강 베르뇌유가 자리해 있다. 평일에는 부부가 사는 집이지만, 주말이 되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부티크 매장으로 변신하는 곳이다. 진짜 조화는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예상치 못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 믿는 로제마린 드 비테는 이곳에서 삶의 파트너 피에르 트라베르시에와 함께 서로의 다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아로강 베르뇌유Arrogant Verneuil’(대담한 베르뇌유 거리의 공간이라는 뜻)가 있는 장소는 로제마린 드 비테Rozemarijn de Witte가 15년 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곳이다. 예전에 이곳에는 모니 린츠아인슈타인Mony Linz-Einstein이 운영하는 앤티크 숍 에포카Epoca가 있었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친척이자, 열정적인 예술·디자인 수집가였던 그는 시대를 초월한 가구들을 기묘한 조합으로 엮어냈고, 거기에는 예기치 못한 균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의 틈을 비집고 나온 듯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공간 분위기에 매료된 로제마린 드 비테는 바로 단골손님이 되었고, 언젠가 이 장소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써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에포카가 문을 닫게 되어 인수를 제안받은 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매를 결정했다.
오랫동안 꿈꿔온 공간인 만큼 머릿속에는 이미 완성된 그림이 있었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질감, 따뜻함과 날카로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조화롭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요소가 오히려 묘한 질서를 이루어내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건축가 라파엘 피알루Raphaël Pialoux, 파비앵 코송Fabien Cosson, 그리고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인 에리크 귀테르Erik Gutter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바람은 명확했다. 기존 에포카 갤러리의 구조와 정서를 유지하면서도 전적으로 자신의 색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에 넓고 열린 구조는 그대로 두고 층고의 변화를 활용해 공간을 자연스럽게 구분했다. 중심에는 오픈 키친을 배치하고, 침실과 거실은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의 화산재 타일로 경계를 나눴다. 바닥은 단순한 마감재가 아니라 공간의 리듬과 무게중심을 조율하는 포인트로 사용하고, 벽난로는 1960년대 프랑스 도예가 피에르 디강Pierre Digan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비자의 작업실에서 직접 만든 도자기 타일을 한 장 한 장 손으로 붙여 완성했다.
버려진 호텔, 오래된 하우스보트, 낡은 작업실을 특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알고 보니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일했더군요.
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면 거부하지 않는 편이에요. 공간을 만든다는 느낌보다는 공간의 이야기를 듣고 단서가 되는 오브제들을 찾아 퍼즐처럼 짜맞추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맥락을 찾아 이야기를 조합하는 일은 제가 원래 하던 저널리스트 일과 비슷했죠. 호텔 로스 에나모라도스Los Enamorados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호텔 운영 경험도, 정교한 사업 계획도 없었지만 버려진 핀카finca(스페인의 전통 농가 건축)의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리서치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죠. 모든 공간 작업은 그렇게 우연히, 가볍게, 즐겁게 시작해요.
‘아로강 베르뇌유’ 공간 작업도 마찬가지였겠네요.
맞아요. 우연과 행운의 결합이었죠. 오랫동안 몽마르트에 살았고 그 장소와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갤러리 에포카에 들를 때마다 모니 린츠아인슈타인이 농담처럼 “이 공간의 다음 주인은 당신이야”라고 말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실제로 전화를 걸어 이 장소를 넘겨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어요. 서로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지만 예상치 못한 것들을 조합하는 감각은 비슷했죠. 저는 이곳을 갤러리나 매장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생활하고 일하고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어요.
에포카 같은 갤러리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왜 집이란 형태를 선택했나요?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일상을 보내는 장소에서 두 사람의 개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브제로 둘러싸인 매장 말고 일상의 기운이 가득한 집을 보여주고, 취향과 감성이 공유되면서 타인의 집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했죠. 물론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앞쪽 공간은 희귀한 오브제, 빈티지 가구, 세라믹, 의류 등을 판매하는 부티크, 그 뒤쪽에는 우리가 실제로 사는 거실과 주방, 그리고 작은 전시 공간을 배치하는 식으로 나누었어요. 또 금·토요일에만 집을 오픈하고, 후면의 쇼룸과 거주 공간은 특별한 이벤트나 예약을 통해서만 공개해요.
집 안에 있는, 사용하고 있는 가구와 물건은 모두 판매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귀한 컬렉션이라도 누군가 정말 원한다면 판매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몇몇은 절대 내줄 수 없죠. 예를 들면 흰색과 검은색 인물이 입을 맞추고 있는 형상의 둥근 조각은 우리 부부를 닮아서 소중히 품고 싶어요. 아르네 야콥센의 1세대 에그 체어 또한 빈티지 고유의 멋과 개인의 추억이 깃들어 있어서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이 집을 둘러보면, 이렇게 다른 각각의 개성적인 물건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생각해보게 돼요.
우리는 보통 조화로움이란 완벽하게 맞물린 것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조화는 때때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충돌 속에서 생겨나요. 서로 다른 목소리, 다른 리듬, 다른 색채가 겹쳐질 때 의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죠. 모자이크 조각처럼요. 불협화음이라 여겼던 것들이 결국엔 전체를 완성하는 중요한 조각이 되는 것입니다. 조화는 같음이 아니라 다름을 포용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악셀 페르보르트Axel Vervoordt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진짜 조화란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예상치 못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해요.
그럼 본인의 스타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스타일이 딱 정해져 있지 않은 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해요. 컬렉션을 구성할 때도 시대나 장르를 구분하지 않아요. 그냥 ‘이건 너무 매력적이다’ 싶은 것들을 선택하죠. 그래서 아로강 베르뇌유에 오면 1950년대 빈티지 가구 옆에 현대미술 작품이 있고, 팝아트와 전통 공예품이 한 공간에 있어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걸 좋아해요. 잡지를 만들 때도 같은 원칙을 따랐어요. "린다Linda"를 창간할 때 나는 최고 수준의 사진이 실린 고급 매거진을 추구하되 여성 명품 잡지 분위기가 아니라, 기존 여성 잡지처럼 무난한 콘텐츠가 아니라, "니우에 레뷔Nieuwe Revu"나 "폴크스크란트 매거진Volkskrant Magazine"처럼 날것의 감성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죠. 인테리어도 마찬가지예요. 완벽하게 정리된 집보다는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섞여 있는 공간이 훨씬 더 흥미롭죠.
공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요?
‘약간의 실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게 지나치게 완벽하면 오히려 금세 지루해지거든요. 공간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깔끔하게 정돈된 곳은 금방 질려요. 오히려 약간의 결함, 예상치 못한 요소가 있는 공간이 훨씬 더 매력적이에요. 사람 얼굴도 좌우가 미세하게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 비대칭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잖아요. 그래서 공간을 만들 때 일부러 불완전한 부분을 남겨두기도 해요. 그게 더 자연스럽고 살아 있는 느낌을 주니까요.
“공간도 ‘약간의 실수’가 필요해요. 모든 게 지나치게 완벽하면 오히려 금세 지루해지거든요.”
당신과 삷의 파트너 피에르 트라베르시에Pierre Traversier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자이크 조각과 같다고 했어요.
피에르와 저는 정반대예요. 저는 조용하고 사적인 편이고, 피에르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죠. 저는 작은 디테일을 오래 들여다보고, 피에르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요. 저는 공간을 꾸미는 걸 좋아하고, 피에르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탁월하죠. 서로 다른 성향이지만 함께할 때 놀라운 조화를 만들어내요. 피에르는 저에게 음악과 햇살을 안겨주고, 저는 그에게 안정과 확신을 전해줘요.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우며, 그렇게 하나의 중심을 만들어가요.
함께 비즈니스를 할 때는 불협화음의 균형을 맞추나요?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예요. 때로는 의견이 다를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죠.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 삶을 대하는 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기에 조금 엇갈릴지언정 결국엔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요. 그게 우리를 다시 균형으로 이끄는 힘이에요.
살면서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극복했나요?
아주 단순한 원칙을 지켜요. ‘서로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 말이 우리를 수많은 갈림길에서 지켜줬어요. 한 사람이 확신이 서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아요. 항상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해요.
영감을 주는 집에 사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있죠. 저는 아름다운 공간이 사람을 지켜준다고 믿어요. 공간은 단순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주는 존재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멋진 인테리어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죠.
영감 가득한 공간을 만드는 비결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비법이나 조언을 구하는데, 저는 항상 공간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라고 말해요. 저는 특별한 재능도 없고, 인테리어 디자인 관련한 교육도 받지 않았어요. 어릴 적 저는 말이 없는 아이였고,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일찍 깨달았죠. 그래서 항상 분위기와 흐름을 따르는 법을 터득하려고 노력한 것 같아요. 공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예요. 계획을 세우긴 하지만 공간이 스스로 말하는 걸 듣고 그것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죠. 그 과정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함께 담기는 것 같아요. 저에게 공간이란 장소가 아닌 살아 있는 것,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가 새겨지는 현장이에요.
지금까지 본인의 일 외에도 알음알음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요.
맞아요.(웃음)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과 기질 때문이죠. 모로코 여행에서 쇼핑을 하면서도 문득 ‘여기에 정말 멋진 상점 하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상상을 하고, 일본에 갔을 때도 ‘유럽에 일본식 호텔이 있으면 좋을 텐데’라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나서죠. 예전에는 결과를 위해 이 일을 했지만 지금은 내가 좋아해서 선택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공간 디자인이든, 상품 판매든, 정원 일이든—그건 시들함의 강한 해독제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요.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만드는 일 자체가 중요하고 신명 나요. 그런 활력을 찾아 늘 다음 프로젝트를 꿈꾸죠.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요.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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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그라피 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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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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