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6구의 한 골목, 마치 시간의 틈새처럼 존재하는 부티크가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수집가, 이야기꾼인 마랑 몽타구는 오래된 물건들 사이에서 잊힌 감정을 되살려낸다. 수채화로 시작된 그의 세계는 향수, 유리잔, 타로 카드, 책과 공간으로 확장되며 감각보다 감정을 먼저 건드린다.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손길, 벼룩시장의 팔레트, 18세기의 비밀 책에서 그는 늘 새로운 상상을 길어 올린다.
책장 사이를 걷다 보면 꼭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책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파리 장인들의 공방을 소개하는 “시대를 초월한 파리(Timeless Paris)”, 프랑스 전역의 앤티크 오브제와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오브제를 소개하는 “기이한 컬렉션(Extraordinary Collections)”, 빈티지와 현대가 공존하는 파리의 집 열다섯 채를 다룬 “메종 : 파리지앵 시크 앳 홈Maison: Parisian Chic at Home)”이 그렇다. 마치 오래된 편지지의 결을 어루만지듯 페이지마다 손끝이 머무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꼼꼼히 보고 싶은 책.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담겨 있고, 핸드 페인팅으로 정성스럽게 그린 그림과 독특한 이미지로 채워져 있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오래된 기억의 서랍을 하나씩 여는 기분이었다. 한번에 읽기보다는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편지를 열어보듯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이 책들은 인테리어 및 세트 디자이너이자 영화감독, 프로듀서, 일러스트레이터인 마랑 몽타구Marin Montagut의 작품이다.
프랑스 남부의 햇살 속에서 태어난 한 소년은 언젠가 예술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런던의 세인트 마틴스에서 예술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졸업 후 파리로 돌아와 영화 세트와 미술 소품을 만들며 살았다. 그는 작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좁은 파리 골목을 누비며 도시의 모퉁이마다 숨겨진 풍경을 눈에, 그리고 손끝에 담았다. 손때 묻은 간판과 오래된 공방, 빛바랜 가게들을 펜으로 그려 작은 지도를 만들고, 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담은 가이드북을 만들어 편집숍 메르시Merci와 콜레트Colette에 직접 찾아가 판매했다. 그의 지도와 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수채화를 시작했다. 그가 그리는 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뤽상부르 공원의 초록 의자, 낡은 타로 카드, 손때 묻은 나무 팔레트 같은 소박한 일상의 물건. 하지만 그의 손을 거치면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수채화는 도자기와 스카프, 향초, 노트 같은 물건으로 옮겨져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이름을 딴 부티크 마랑 몽타구는 파리 6구의 마담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16세기 유럽의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을 옮겨놓은 듯한 이 공간엔 앤티크 장난감과 기계 인형, 수제 지구본 같은 수집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사이사이로 그의 손에서 태어난 창작물이 어우러져 있다. 유리공예 병, 파피에 마셰papier mâché(종이 반죽)로 빚은 상자, 수작업으로 그린 일러스트가 담긴 에나멜 테이블웨어, 수채화 타로 카드, 그리고 작은 디오라마diorama(실물 축소 모형)까지 모든 것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곳에 들른 사람들은 매혹적인 오브제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간을 탐험한다. 유리잔을 사러 온 사람이 스카프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오브제를 들고 나간다.
부티크가 당신의 책처럼 매우 매력적이에요. 이 공간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요?
제 꿈은 파리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게를 여는 것이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1900년대 파리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작은 상점이죠. 그래서 매장 문을 열었을 때, 마치 오래전 파리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면 했어요. 나지막한 초인종 소리와 함께 여정이 시작되고, 문턱을 넘는 순간 시간이 느려지기를 바랐죠. 100년 가까이 된 나무 바닥을 그대로 사용하고, 오래된 왁스 냄새가 스며든 나뭇결이 잊고 있던 기억처럼 은은히 퍼져요.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위로 1920~1940년대 파리의 음악이 흐르죠. 제가 직접 고른 곡이에요. 공간은 계절에 따라 향이 바뀌어요. 봄엔 오렌지꽃, 여름엔 무화과, 가을엔 잘린 풀, 겨울엔 장작 타는 냄새. 그런 향의 흐름이 이 작은 공간을 각기 다른 시대로 이끌어주죠.
무엇보다 매장 전체를 압도하는 1930년대 칸막이 가구가 인상적이에요. 그 덕분에 이곳이 과거 식료품 매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앤티크 갤러리였던 것 같기도 해요.
호기심의 방은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특이하고 진귀한 물건을 모아놓은 방이에요. 예술 작품을 포함해 세계 곳곳의 진귀한 유물을 전시했죠. 그에 맞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가구를 유용하게 사용했어요. 프랑스 남부에서 구한 1930년대 식료품점 칸막이 장인데, 칸마다 오브제를 주제별로 나눠 각기 고유한 분위기에 따라 배치할 수 있죠. 매장 안쪽에는 작은 쇼윈도가 몇 개 있는데, 계절이나 특정 테마에 맞춰 하나의 장면처럼 구성해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린 시절의 추억, 가족과 지내던 모습 같은 것을 떠올리며 장면을 만들죠. 오브제를 진열한다기보다 작은 세계를 연출한다는 느낌이에요.
상점과는 또 다른 분위기예요. 작가의 작업실 같기도 하고, 파리에 있는 집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저는 이곳이 파리에 있는 제 집, 작업실, 그리고 노르망디의 오두막이 공존하는 곳이길 바랐어요. 1900년대 잡화점처럼 누군가 유리잔을 하나 사러 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오브제를 손에 들고 나가게 되는 곳, 그게 이곳의 매력이에요. 요즘 세상은 너무 빠르고 정확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 시와 기쁨이 공존하는 느린 리듬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날그날의 빛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진열, 직접 꾸민 쇼윈도, 손으로 만든 오브제, 모든 것이 시각보다 감정을 먼저 자극했으면 했어요.
과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과거는 언제나 출발점이에요. 영감은 대부분 그 지점에서 떠올라요. 벼룩시장이나 오래된 예술 상점에서 우연히 오래된 팔레트를 발견하면, 문득 나만의 팔레트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기죠. 19세기 유리잔을 오랫동안 수집했는데, 이것이 지금 제가 만드는 핸드 페인팅 유리잔의 출발점이 되었죠. 과거의 물건이 현재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또 다른 상상력의 문을 열어줍니다. 과거는 제게 ‘끝난 시간’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길어 올리는 우물 같은 존재예요.
특별히 아끼는 재료가 있나요?
석고를 유난히 좋아해요. 차갑지만 동시에 아주 부드러운 재료지요. 손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그 미세한 거친 질감이 사람의 체온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브랜드 로고로 사용하는 ‘손과 하트’도 석고로 만들었어요. 누군가가 손으로 빚은 것에서만 느껴지는 불완전한 따뜻함, 자연스러운 결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건 제 모든 작업에서 추구하는 감각이기도 해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정직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감정 같은 것.
매장에는 당신의 수집품과 창작품이 적절히 섞여 있네요. 오브제들이 모여 하나의 경이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 같아요. 당신의 창의성과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오브제를 하나 꼽는다면요?
쉽지 않지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18세기의 비밀 책, 지구본, 팔레트. 우선 비밀 책은 겉보기엔 낡고 평범한 고서 같아요. 하지만 책장을 펼치면 그 안에 작은 보석이나 에로틱한 그림이 숨어 있어요. 과거의 누군가가 자신만의 은신처를 만들고,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책장 사이에 끼워두는 상상을 해요. 그런 비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요. 지구본은 제 어린 시절과 깊이 연결돼 있어요. 어릴 적 제 침대 옆엔 늘 조명 지구본이 있었어요. 저는 불을 켜야만 잠들 수 있는 아이였거든요. 부모님은 램프 위에 그 지구본을 올려놓았고, 저는 그 빛을 타고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죠. 지금도 18세기 지구본을 수집해요. 제 별자리를 따라 18세기 스타일의 지구본을 직접 만든 적도 있어요. 손으로 지구를 그린다는 것, 그건 마치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분이었어요. 팔레트는 50개 넘게 수집한 것 같아요. 어떤 팔레트는 파란색 물감만 유독 많이 남아 있어서 ‘이 화가는 파란색을 정말 사랑했구나’라고 생각되고, 또 어떤 것은 물감이 너무 적게 남아 있어서 그 사람이 당시 어떤 형편이었을지 상상하게 만들어요. 물건 하나하나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게 늘 놀랍고, 또 애틋해요. 그래서 저에게 오브제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에요. 감정을 보관하고 기억을 환기시키는 타임캡슐 같은 거죠.
최근 향수 ‘로 도스L’Eau Douce’를 출시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향수 제작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품어온 꿈이었어요. 오렌지꽃, 베르가모트, 레몬, 민트, 화이트 머스크 그리고 무화과 나무의 향. 이 모든 향은 제가 이탈리아에서 보낸 어느 여름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아요. 향 자체는 빠르게 결정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린 건 병과 상자였어요. 저는 그것이 단순한 패키지가 아닌,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고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보는, 그런 물건이 되길 바랐거든요. 고전적인 오 드 코롱 병에 쓰던 상자의 질감, 손 글씨의 부드러운 곡선, 병목을 감싼 금빛 메달까지, 모든 것에 손길을 더했어요. 이건 단지 향수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한 조각의 기억, 한 장면의 감정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에 처음 흥미를 느낀 건 언제였나요?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제 주변에는 그림과 물건, 오래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부모님이 앤티크 상인이었고, 집 안 가득 낡은 가구와 오래된 책, 색이 바랜 직물이 놓여 있었어요. 마치 작은 박물관 같은 곳에서 자랐죠. 저는 항상 무언가를 그렸고, 학교에서 드로잉 수업을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기뻤어요. 열여덟 살 무렵 런던 세인트 마틴스 스쿨에서 1년간 다양한 미술 분야를 배웠는데, 그중 수채화가 유독 특별했어요. 제 감정과 생각이 종이 위로 가장 자연스럽게 번져나가는 느낌이었죠. 그때 이후로 제 작업은 늘 수채화를 중심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하얀 벽과 정돈된 미니멀 스튜디오보다 오래된 물건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작업하는 게 더 좋아요. 그 물건들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새로운 오브제를 구상하게 되니까요.
이곳에 들른 사람들이 홀린 듯 구입해 가는 것이 타로 컬렉션이더군요. 이곳에서 타로 리딩 세션도 연다고 들었어요.
할머니가 예술가였어요. 제가 다섯 살 때부터 타로 카드를 펼쳐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건 예언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였고, 마법이었고, 마음을 꺼내는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언젠가 나만의 타로 카드 덱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했어요. 지난 2년 동안 타로 카드를 하나하나 직접 그렸어요. 카드를 그리는 시간은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모인 이미지들은 제가 지금까지 만든 오브제 중 가장 많은 이야기와 그림을 품고 있죠. 지금은 부티크에서 한 달에 두 번, 점성술사를 초대해 타로 리딩 세션을 열고 있어요. 저에게 타로는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열게 만드는 하나의 통로라 생각해요.
당신의 오브제는 대부분 일상적인 물건이에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모든 작업은 늘 책상 위에서, 수채화 한 장에서 시작돼요. 처음엔 종이 위에 있던 그림이 어느 날 실크 위로 옮겨졌고, 그걸로 만든 스카프를 처음 봤을 때 정말 놀랐어요. 그림이 유리나 도자기, 천 위로 옮겨졌을 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어요. 그래서 일상적인 오브제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컵, 노트, 조명, 접시 등 일상적인 물건에 무한한 이야기가 담길 수 있거든요. 손에 쥘 수 있고, 매일 곁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는 일, 이것이 가장 설레는 창작이에요.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공예품처럼 아름다운 책을 통해서였어요. 출판 여정이 궁금하네요. 어떻게 시작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콘텐츠는 어떻게 변했나요?
첫 책을 출판한 것은 스물여덟 살 때였는데 당시 출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도시의 얼굴을 제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남기고 싶었던, 아주 개인적인 시도였어요. 서점 안에 자리한 와인 바에서 아페리티프를 마시고, 보름달 아래에서 머리를 자르고, 평범한 식당의 뒷문 너머 숨겨진 칵테일 바에서 밤을 마무리하는, 그런 저만의 비밀스러운 파리 여정을, 방수·방열 종이로 만든 주머니 크기의 책과 손수 그린 수채화 지도에 담아냈어요. 책을 만들기 위해 통장에 남은 전 재산을 쏟아부었고, 스스로 인쇄를 맡겨 자비로 출판했어요. 그리고 베스파에 책을 싣고 메르시와 콜레트에 찾아가 직접 설명했죠. 처음엔 20권을 팔았고, 몇 주 뒤에 수백 권을 추가 주문받았어요. 그렇게 조금씩 사람들이 제 책을 알게 되면서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당시로는 꽤 새로운 방식이었고, 저에게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어요.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어떤 책인가요?
2026년 출간을 목표로 “영원한 파리(Forever Paris)”라는 제목의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아직은 비공개인 프로젝트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사진 없이 오직 제가 그린 일러스트만으로 채우는 책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만든 책 중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파리에 바치는 헌사가 될 것 같아요.
당신의 스토리는 파리 또는 어느 도시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새로운 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 도시를 바라보는 당신만의 시선이나 탐험 방식이 있나요?
어딜 가든 가장 먼저 벼룩시장을 찾아요. 벼룩시장은 그 도시의 속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곳이에요. 낡은 테이블에 무심하게 놓인 오브제, 오래된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누군가의 바랜 사진, 흠집 난 유리잔 하나에서도 그 도시의 모습을 읽을 수 있죠. 이곳 사람들이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 조금씩 느끼게 돼요. 그리고 그런 시선이 저만의 여정이자 수집이 되고, 나중엔 새로운 상상으로 이어지곤 하죠. 도시의 첫인상을 향기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항상 물건과 감촉으로 기억해요. 낡고 작고 오래된 것들이 그 도시를 가장 잘 설명해주거든요.
“도시의 첫인상을 향기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항상 물건과 감촉으로 기억해요. 낡고 작고 오래된 것들이 그 도시를 가장 잘 설명해주거든요.”
당신에게 파리는 어떤 의미일까요?
파리와 저의 관계는 끝없는 연애 같아요. 처음 파리와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어요. 예전에는 잘 가지 않던 몽마르트르도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열어 찾게 됐고, 이젠 그 언덕 위 풍경이 참 정겹게 느껴져요. 파리의 매력은 구역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마치 수십 개의 작은 마을이 한 도시에 모여 있는 것 같아요. 같은 거리라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고, 그 안에서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죠. 20년 넘게 살았어도 여전히 처음 보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파리는 지루할 틈이 없는 도시예요.
여전히 이 도시가 당신을 놀라게 하나요?
파리는 제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사랑이에요. 처음 도착했을 때가 열아홉 살이었죠. 그때부터 모든 게 영화 같았어요. 카페의 작은 원탁, 낡은 아파트의 창틀, 골목을 돌아 만난 제과점의 쇼윈도까지, 모든 게 엽서 속 장면 같았어요. 그 도시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지금도 문득 베스파를 타고 파리 거리를 달리다 보면 놀라게 돼요. ‘아, 내가 지금 이 도시에서 살고 있구나. 벌써 20년이 넘었구나.’ 가끔 거리를 걷다 관광객 무리를 지나칠 때면 속으로 이렇게 말해요. ‘나는 관광객이 아니야. 여기에 사는 사람이야.’(웃음) 그 말 한마디에 담긴 감정이 꽤 커요. 이 도시가 나를 품어주었다는, 내가 이 도시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나 디자이너가 있나요?
이름 없는 예술가들이에요.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작은 그림에서 마주하는, 어딘가 어설프고 순진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남는 터치. 그런 그림을 볼 때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요. 거기에 담긴 손길은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니까요. 설명되지 않아 더 깊이 닿는 예술, 저는 그런 감동을 따라가요.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