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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네트워킹, 다양성, 프리미엄

보통 사람을 위한 창작 공간

누메로벤티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지금은 누구에게나 창의력이 필요하고 새로운 생각, 참신한 아이디어를 끌어내기 위해 시간, 공간, 분야의 축을 이동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같은 창작 공간은 어디 있을까요?” 벨기에와 스페인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고향 피렌체로 돌아온 디자이너 마르티노 디 나폴리 람폴라가 누메로벤티를 설립한 이유다.








어느 아티스트는 프랑스 남부 카시스Cassis의 카마르고 파운데이션Camargo Foundation이 운영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의 경험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고백했다. 절벽 위에 지은 빌라에서 매일 바다와 눈을 맞추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다른 영역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역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보통 예술가에게 1년 또는 그 이상 숙식은 물론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이처럼 작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성장판 역할을 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마르티노 디 나폴리 람폴라Martino di Napoli Rampolla는 벨기에와 스페인에서 일하면서 창작에 대한 결핍과 갈증이 점점 커졌다. "크리에이티브업계에 흔한 고질적 문제가 있는데, 열정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지만 몇 년 지나면 본래 하고 싶었던 일과 전혀 다른, 창작이 아닌 노동에 매몰된다는 점이죠.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하는 방식과 구조적 조직의 폐해죠.” 그는 과감히 그곳 생활을 접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굳어버린 창작의 심지에 불을 지펴줄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찾았다. 하지만 순수 예술가가 아니면 지원이 힘들었고, 쉼이 아닌 전환을 목표로 하는 창작자를 자극하고 지원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창작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인 프로그램을 찾았어요. 없다면 직접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죠.








다행스럽게도 그에겐 적합한 장소가 있었다. 할머니 삼촌으로 화학자이자 연극 연출가 지롤라모 팔리아노Girolamo Pagliano가 소유했던, 1510년에 지은 팔라초 갈리 타시Palazzo Galli Tassi 건물 일부를 유산으로 상속받은 것이다. 이 건물의 원래 주인은 부유한 상인이었다. 이후 군인이자 정치가인 바초 발로리Baccio Valori를 시작으로 수많은 저명인사를 거친 후 1623년 갈리 타시 가문이 매입했다. 그들은 아들 결혼식을 계기로 건물을 확장하고 내부를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프레스코화로 장식했고, 이후 지롤라모 팔리아노가 건물 전체를 매입해 집과 작업실로 사용했다. 마르티노 디 나폴리 람폴라는 공간 관리자 다니엘레 치베트Daniele Civett, 매거진 <오픈하우스> 디렉터 앤드루 트로터Andrew Trotter와 함께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셰프, 광고 창작자, 그래픽 디자이너, 음악가, 소설가 등 창작자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레지던시 공간을 기획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이벤트를 열고 예술가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게스트 하우스로 확장했다. 미래를 이끄는 힘은 창의력이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창의력이 필요하고 새로운 생각, 참신한 아이디어를 끌어내기 위해 시간, 공간, 분야의 축을 이동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그는 보통 사람을 위한 창작 공간 누메로벤티Numeroventi를 설립하게 된다.








두오모 성당과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 피렌체 특유의 좁은 돌길을 따라가다 보면 웅장한 건물 한 채와 마주하게 된다. 이탈리아 건축물이 그렇듯 겉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간판이 달린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투명한 햇살과 바람이 감춰져 있던 내부의 모습을 밝힌다. 뚫린 천장에서 햇빛이 쏟아지는 1층 중정에는 건물을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기둥이 중앙에 자리하고 높이 5m가 넘는 아치형 천장 아래 헤라클라스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리셉션에는 천장까지 가득 메운 프레스코화가 르네상스 시대의 축약된 이야기를 감싸 안고 있다.



화려했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벽, 천장, 바닥 사이사이에 컨템퍼러리 작가의 도자기, 그릇, 테이블, 의자 등이 군더더기 없이 놓여 있다. 이 작품들은 아티스트 카시아 푸다코프스키Kasia Fudakowski, 듀오 디자이너 그룹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 포토그래퍼 할리 위어Harley Weir, 디지털 디자이너 알렉시스 크리스토둘루Alexis Christodoulou, 세라믹 디자이너 빌럼 판호프Willem van Hoof 등 이곳에 장기간 머물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창작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자 영감이다. 세라믹 작품을 만든 포토그래퍼 할리 위어처럼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창작자와 협업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협업’과 ‘공동체’, 이 두 가지 키워드는 누메로벤티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창작이란 엉덩이를 책상에 붙이고 앉아 형태나 미학을 연구하거나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목적, 가치, 기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싹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관련 없는 두 가지 사실이나 아이디어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창의적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이연 연상이 일어나지 않던가.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의 저자 알렉스 펜틀런드 또한 서로 연결되고 외부와 많이 접촉하는 개인, 조직, 도시일수록 더 높은 생산성, 창조적 성과, 더 건강한 생활을 향유한다고 강조했다. 마르티노 디 나폴리 람폴라는 누메로벤티를 장소가 아니라 창작 공동체로 인식하길 바란다. 이곳을 만들 때 이 점을 핵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같은 빈 공간을 마련했다.



전시나 이벤트가 열리는 중정, 레지던시 거주자와 게스트 하우스 숙박객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대형 테이블, 누구나 내부를 볼 수 있는 오픈형 주방, 책과 소파가 가득한 리셉션 등이 그렇다. 창작자 공간에도 각자의 공간이 있지만 별도의 공용 거실과 주방이 있다. “이곳에서는 침묵보다 대화를, 대화를 넘어 식사를 함께하기를 권합니다. 보편적인 사람도 섞일 수 있는 공용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벽을 대부분 제거했어요. 오브제 측면에서 공동체 의식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아마 엄청난 양의 의자, 벤치, 테이블일 것입니다. 저에게 의자는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고 창의력의 상징이죠. 낯선 이들의 대화와 요청은 예상치 못한 관계의 확장과 즐거움을 줍니다.




이곳은 세계 각국에서 온 낯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장을 마련해주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죠.”




독일 예술 학교 졸업 후 요리사의 길을 택한, 베를린에 거주하는 일본인 셰프 아와즈하라 아야미는 셰프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남편 그리고 6개월 된 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녀는 누메로벤티에 상주하는 피에솔레Fiesole 출신 이탈리아인 셰프 미케알라 이오디체Micheala Iodice와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시장에 들러 토속 음식 재료 등을 살펴보고 레지던시 마지막 날 열리는 전시 이벤트를 구상 중이다. “할머니 세대가 터득한 레시피와 음식에 관한 지혜, 젊은 여성 세대의 미각과 관점을 조합해볼까 해요. 이탈리아 할머니들도 식사에 초대할 예정입니다. 셰프에게 창의성이란 내 맛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맛있는 음식을 팔겠다고 하면 라면을 팔아야죠. 셰프의 진심, 손맛, 음식에 대한 자세가 느껴지는 요리를 창조하는 일은 예술가가 1년 동안 대형 추상 작품에 매달리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창작 과정이에요. 그런 뜻에서 이곳은 이탈리아 재료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낯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장을 마련해주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죠. 차가운 주방이 아니라 아트 작품으로 둘러싸인, 정서적 자극이 가득한 공간은 창의력을 북돋아주죠.” 그녀는 음식뿐 아니라 아티스트 카시아 푸다코프스키, 콜레빌카 글라스 스튜디오Collevilca Glass Studio와 함께 그릇, 주전자, 램프 등으로 이뤄진할머니 시리즈’를 기획했다. 세대 간의 지혜, 신체적 차이, 제한적 의무를 유연한 유리와 단단한 철로 비유한 것이다.










누메로벤티는 크게 아티스트 레지던시, 셰프 레지던시, 게스트 하우스로 나눌 수 있지만 창작자라면 누구나 이곳에 와서 먹고 즐기고 머물 수 있다. 장기간 숙박, 식사, 전시 기회 등을 제공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순수 예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사진, 그래픽, 과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지원한다. 하루 종일 해가 드는 복층 구조 레지던시에는 그곳에 머물며 영감을 얻고 간 이들의 명찰이 달려 있는데, 가수 아그네스 누네스Agnes Nunes, 예명인 블러드 오렌지Blood Orange로도 잘 알려진 음악가 데브 하인스Dev Hynes, <시리얼> 매거진 포토그래퍼 리치 스테이플턴Rich Stapleton 등의 이름이 보인다.



누메로벤티는 이처럼 이질적인 서로 다른 규율이 충돌하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 예술과 비예술, 상업과 비상업, 평범한 것과 특이한 것 등이 불협화음을 이루는 장소다. 그렇게 서로 관계가 먼 것들이 연결되고 통합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곳에 머물다 간 사람들이 놓고 간, 리셉션 테이블에 놓인 책 목록만 봐도 얼마나 다양한 분야가 충돌하는지 알 수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 특유의 고결한 감성과 여유롭다 못해 권태로운 시간도 창의성을 돋운다. 중정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동안 간과했던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나태하고 심심한 시간을 무언가로 허겁지겁 채우지 않고 그냥 흘러가게 놔두는 것. 공백이 생겨야 새로운 생각으로 다시 채울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엄숙하지 않다. 휴가지에 온 것같이 가벼운 마음을 가져야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창작자가 아니라 해도, 여행자 자격만으로도 이곳에 머물 이유는 충분하다. 피렌체는 위대한 과거의 유산에 압도당해 인간을 중심으로, 현재 진행형 시점으로 구경하긴 힘든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화려했던 피렌체만 기억하고 돌아간다. 하지만 누메로벤티는 침묵으로 일관된 시간을 깨뜨린다. 보다 능동적으로, 생생한 현대적 어법으로 피렌체를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여행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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