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보고, 외출하기 전에 또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보이지만, 근대 이전 사람들은 대부분 거울을 보지 못했다. 거울을 본다는 행위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현대 삶 속의 다양한 기능이 과거 서양 주거 공간 속 거울의 구실과 비교해 어떻게 변화됐을지, 그리고 가구로서의 거울과 거울을 본다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의 거울의 방. / ©Myrabella
아내가 출근하기 전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보며 마지막 점검을 한다. “이 반바지는 좀 아닌 거 같아.” 그 반바지는 내가 조금 전 골라준 것이다. 아내는 출근할 때마다 두 가지 옷을 보여주며 뭐가 더 낫냐고 묻는다. 나는 결혼 연차가 쌓이면서 이 질문에 진지하게 응해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깨달음 뒤로는 정말로 내 온갖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논리적 근거를 대가며 선택해준다. 아내가 그런 정성 어린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모습을 거울로 보고 또 뒤로 돌아서 거울을 보면서 만족스럽지 않은지 자꾸 구시렁거린다. 나는 아내가 빨리 현관문을 닫고 출근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아내는 결국 다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청치마를 입고 만족한 듯 출근한다. 아내의 출근 전 근심과 우려는 사실 그 옷이 진짜 어울리느냐 아니냐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진짜 원인은 ‘거울’이다.
거울이란 자신을 보며 타인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확인함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도구다. 그것으로 자아에 대한 감각까지 생겨난다.
현대인은 거울에 익숙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보고, 집을 나설 때 또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 내 아내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는 행위는 현대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절차이자 의식이고, 현대의 보편적 라이프스타일이다. 그것은 요즘 짓는 아파트와 연립주택 현관문 옆에 커다란 거울을 설치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자들은 가방 속에 콤팩트를 가지고 다니며 언제든지 거울을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의 셀카 기능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언제든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자신의 얼굴이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지 안 좋아 보이는지, 또 스스로 만족스러운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이라는 사물이 생겨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거울을 소유한 역사는 극히 짧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거울은 극소수의 귀족과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거울을 가진 귀족과 부자들은 늘 자신의 얼굴과 몸치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치장이라는 행위 자체가 거울의 산물이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몸치장이 좋아 보이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런 판단을 근거로 더욱더 몸치장에 몰입하고 거기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게 된다. 반면에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볼 수 없는 하층민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스스로를 치장할 동기를 얻지 못한다. 동기가 없으므로 차림새가 남루하다. 하층민은 상대적으로 시간과 자원이 없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몸치장과 멀어진다.
근대 이전 거울은 고가의 사치품이어서 이처럼 테두리를 사치스럽게 장식했다. / ©Aleph500Adam
차림새만 남루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면 행동도 비루해지기 쉽다. <미디어의 이해>에서 마셜 매클루언은 “거울의 역사는 의상, 예절, 그리고 자아에 대한 감각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빈민가의 학교 교장이 교실마다 커다란 거울을 설치해 학생들의 학습 능률을 놀랍도록 높인 사례를 든다. 거의 거울을 보지 않고 살던 빈민가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런데 거울을 보자 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시각적 감각이 생겨나 자신이 성장하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거울이란 자신을 보며 타인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확인함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도구다. 그것으로 자아에 대한 감각까지 생겨난다. 그렇다면 돈이 없어서 거울을 살 수 없었던 근대 이전의 하층민에게는 자기 개발에 대한 동기는 물론 자아에 대한 의식조차 희미했을 것이다. 그런 하층민을 보는 귀족의 시선은 한마디로 경멸이었다. 하지만 예의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비루하게 살아가는 하층민의 삶의 태도는 타고났다기보다 거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거울을 본다는 것, 즉 거울을 소유한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자 사치가 아닐 수 없었다.
영화 <위험한 관계> 첫 장면에서 마르테유 후작 부인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거울은 두 가지를 상징한다. 하나는 ‘허영’이다. 유럽 회화 역사에서 거울을 보는 여성을 그린 그림의 제목은 흔히 ‘허영’이다. 거울에 대한 이런 시선은 영화에서도 종종 재현된다. 영화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 메르테유는 질투 많고 아름다운 후작 부인이다. 첫 장면은 메르테유 후작 부인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미모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후작 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을 보다가 점차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데, 앞으로 전개될 그녀의 사악한 계략을 예고하듯 그 미소는 야비하다. 18세기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여유롭게 거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 시기에 거울은 오늘날로 치면 고가의 명품 가구에 해당하므로 이 첫 장면은 후작 부인의 사치스럽고 한가한 삶, 그리고 허영을 대변해준다. 영화 속 후작 부인의 모습은 구스타프 레오나르 드 종이 그린 ‘허영’과 매우 닮아 있다.
영화 <위험한 관계>의 한 장면과 구스타프 레오나르 드 종의 ‘허영’.
거울의 또 다른 상징은 ‘권력’이다. 중세까지 거울은 청동, 구리, 은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 반사율이 변변치 않았고 어두웠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오늘날과 같은 유리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리 거울을 만드는 기술은 베네치아가 독점하고 있어서 그 가격이 대가의 그림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루이 14세가 17세기 말 베르사유궁전에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을 만들었을 때, 그곳에 설치한 17개의 대형 거울은 그 공간을 빛내는 조각품과 가구를 만드는 제작비와 맞먹는 비용이 들었다. 이 거울은 베르사유궁전 방문자들에게 프랑스 왕실의 부와 독점적 기술력을 자랑함으로써 루이 14세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19세기 들어 거울이 대량 생산됨으로써 이제 거울은 그러한 특권과 상징을 잃어버렸다. 거울의 대중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자신만은 볼 수 없는 아이러니를 가진 존재다. 그러니 자신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런 열망이 거울을 탄생시켰다. 나는 현대의 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그 존재 가치를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물건이 거울이 아닌가 싶다. 사치스러운 거울이 필수적인 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TV가 없는 것보다 거울이 없는 것이 훨씬 불편하지 않을까? 거울이 없는 집이 없으므로 그 불편을 모를 뿐이다. 거울이 없다면 우리의 출근 시간은 훨씬 빨라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디자인하우스 월간 <디자인> 기자를 거쳐 최장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다양한 미디어에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