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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다시 한번 가족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을까

TV

Text | Shin Kim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오늘날 사람들은 지하철과 버스에서는 물론 걸어 다니면서도 뭔가를 본다. 영상과 소리를 재생한다는 기능으로만 보면, 휴대용 미디어는 그저 거실의 TV보다 대폭 작아진 TV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아진 대신 이동의 실용성까지 얻었다. 하지만 개인화된 미디어는 TV가 수행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구실을 해내지 못한다. 아니, 해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구실을 파괴했다. 그 구실이란 바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다.






Jarosław Ceborski




아내는 요리나 설거지를 할 때면 아이패드를 틀어놓는다. 일하면서 동시에 드라마나 영화, 짝짓기 프로를 보든지 듣든지 한다. 여기서 아이패드는 TV를 대체한 것이다. 이동이 간편한 TV 정도라고 보면 된다. 크리스 호록스는 저서 <텔레비전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보는 태도를 ‘산만한 텔레비전 시청’이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이렇게 산만하게라도 TV를 보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된 듯하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오늘날 사람들은 지하철과 버스에서는 물론 걸어 다니면서도 뭔가를 본다.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개인화된 미디어가 TV를 대신한 것일지라도 TV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영상과 소리를 재생한다는 기능으로만 보면, 휴대용 미디어는 그저 거실의 TV보다 대폭 작아진 TV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아진 대신 이동의 실용성까지 얻었다. 하지만 개인화된 미디어는 TV가 수행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구실을 해내지 못한다. 아니, 해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구실을 파괴했다. 그 구실이란 바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다.




개인화된 미디어는 TV가 수행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구실을 해내지 못한다. 그 구실이란 바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다.”




한때 TV는 바보상자라는 오명을 쓰며 고상한 라이프스타일과 대비되는, 저속한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사물로 여겨졌다. 우디 앨런의 영화 <남편들과 아내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예술을 모방하지 않는다. 저급한 TV를 모방한다. TV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급한 면과 고급스러운 면을 동시에 지닌다. 위대한 위인들조차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은 저속함이 있다. TV는 인간이 갖는 이런 두 종류의 면이 반영된 사물일 뿐이다. TV는 예능 프로와 교양 프로, 막장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함께 제공한다.





금성사가 생산한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VD-191, 1966/ ⓒ대한민국역사박물관




TV를 바보상자라고 비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TV 앞에서만큼은 능동적인 정신 활동을 중단하고 피동적인 수용자로 전락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TV는 가족 간의 대화를 빼앗아 가는 중죄를 지었다는 누명을 썼다. TV는 가족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TV가 태어나기 전에도 가족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화되기 전 대부분의 가족은 대화보다는 각자의 일을 했다. 근대 이전에는 집 안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여성은 끊임없이 가사에 종사했고, 남자와 아이들도 주어진 일을 했다. 한 장소에 모여 있지도 않았다. 가족 구성원이 다 같이 모일 때는 밥을 먹을 때뿐이었다.



귀족이 아닌 일반인 중에서 일을 하지 않는 여가가 생긴 계급은 19세기 서유럽 국가들의 부르주아뿐이다. 19세기 서유럽에서 부르주아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중산층 가정이 처음으로 태어났다. 이 시기의 가족사진이나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아버지와 아내, 자녀가 거실에 모여 있는 장면을 종종 본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아내는 뜨개질을 하며, 자녀들은 피아노를 치는 딸 주위에 모여 있고, 어린아이는 인형을 갖고 논다. 19세기 중산층 가정에서 피아노의 소유와 자녀들의 피아노 레슨은 성공의 증거와도 같았다. 이런 사진은 가족의 화목과 행복을 연출하고 있다.





라디오를 듣고 있는 미국의 한 가정, 1930/ George W. Ackerman



TV 앞에 모여 시청하는 미국의 한 가정, 1958년경 / Evert F. Baumgardner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으로 쌓은 재산으로 서유럽 가정의 거실은 호사스러운 가구와 직물,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거실은 손님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는 공간인 만큼 더 호사스럽게 꾸몄다. 하지만 거실에서 격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서유럽 가정은 대단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사소한 집안일을 화제로 꺼내 중요한 일을 한다고 여겨지는 남편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9세기까지 서유럽 거실에는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따라서 거실은 가족의 독점적이고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거실에서 대화의 꽃이 피는 경우는 파티를 열어 외부인들을 초대할 때다.



20세기가 되자 가사를 돕는 가전제품이 대중화되고 하인들 숫자가 대폭 줄었으며, 권위적인 가부장 문화도 힘을 잃어갔다. 1920년대에 라디오가 등장하자 가족은 라디오 주위에 모여들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 어딘가에서 사람 소리를 들려주는 기계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공포와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함께 눈물짓고, 퀴즈 프로가 진행되면 함께 문제를 맞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TV가 대중화되자 TV가 라디오 자리를 빼앗았다.





1950년대 미국 가정의 거실. 꽃무늬 벽지, 장식 카펫, 푹신한 의자, 복제 그림, 그리고 가구처럼 생긴 TV가 보인다. 세련된 디자인은 아니지만 이 사물들은 가정의 아늑함과 가족의 결속력을 보증한다. / Carol M. Highsmith




TV야말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주인공이다. TV는 소리뿐만 아니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혹적인 영상을 제공한다. 영화가 그렇듯이 TV가 송출하는 영상은 세련되게 정제되고, 때로는 익살스럽고, 때로는 격렬하게 흥분시키고, 가끔은 고상한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정보를 제공한다. TV는 현실을 벗어나 환상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영화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고 쉽게 제공한다. 더군다나 가족은 이제 TV를 함께 보며 한 시대를 공유한다. 같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감동하고, 같은 스포츠 중계를 보며 열광하고, 같은 뉴스를 보며 비슷한 가치관을 형성한다. 가족은 같은 배우와 운동선수, 유명인을 공유한다. 나는 어린 시절 권위적인 아버지와 서먹한 관계였지만, 일요일 오후 야구 중계를 함께 시청할 때만큼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은 그렇게 TV가 제공하는 영상을 함께 시청함으로써 똑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



TV는 원시인류의 불을 대체한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집을 짓고 살기 전 원시인류는 자연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밤은 위험했다. 이때 불을 피워놓고 가족이 그 주위에 모여 추위를 녹이고,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집은 곧 불을 피운 가족의 안식처가 되었다. 불은 요리를 하고 어둠을 밝히며 공간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가족을 그 주위로 모이게 했다. 기술이 더 발전하자 불의 여러 기능은 가스레인지, 조명 기구, 난방 시스템이 대체했다. 그리고 가족을 모이게 하는 기능은 TV가 대체했다. 20세기의 가족은 자연스럽게 TV 앞에 모였으므로 TV는 원시인류의 불을 대체한 것이 틀림없다.



이제 기술이 더 발전해 각자 개인화된 미디어, 즉 컴퓨터, 아이패드,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되자 가족은 더 이상 거실에 함께 모일 필요가 없어졌다. 채널권을 가진 아버지가 거실에서 좋아하지 않는 프로를 보면, 자녀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자기 미디어를 보면 그만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은 이제 자주 보고 즐기는 영화와 드라마, 스포츠, 뉴스가 다 달라졌다. 좋아하는 연예인도 다 다를 뿐 아니라 아들이 아는 유명인을 아버지가 모르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딸이 모른다. 뉴스를 공유하지 않으므로 가치관도 확연하게 달라진다. 개인 미디어가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TV는 바보상자가 아니며 가족의 결속력을 든든하게 해준 아주 고마운 사물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인공물이 또 등장할 수 있을까.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디자인하우스 월간 <디자인> 기자를 거쳐 최장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다양한 미디어에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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