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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도시, 다양성, 재생

아파트와 작별하는 법

책 와 영화

Text | Kay B.
Photos | Inkyu Lee, Raya, Junyeol Ryu

앞으로 더 많은 아파트가 재개발을 위해 철거될 것이다. 놀이터의 거대한 기린 미끄럼틀과 집집마다 달려 있는 비상등, 키 큰 나무로 기억될 그들의 아파트를 어떻게 하면 잘 보내줄 수 있을까? 지난해 박건희문화재단의 미래작가상에 선정된 류준열의 사진 작업을 최근 캐논 갤러리의 전시에서 마주했다.



류준열 작, ‘115동’, pigment print, 60x90cm, 2019



빛바랜 아이보리색 회벽, 금 간 곳을 메운 시멘트, 그리고 대한주택공사의 상징적 로고가 찍힌 아파트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파트 키드를 자극하는 향수를 느꼈기 때문일까? 류준열의 사진에 담긴 것은 현재까지도 재개발 작업이 진행 중인 둔촌주공아파트다. ‘115동’이라는 제목의 작품에는 부서진 콘크리트가 수북하고 초저녁의 배경은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원래 둔촌주공아파트는 서울에서 손꼽을 정도로 자연이 어우러진 주거 단지였다. 둔촌주공아파트가 속한 강동 지역 아파트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로서는 초록이 무성해지는 이맘때면 유독 다시 보고 싶은 풍경이다. 류준열이 포착한 ‘115동’을 마중물 삼아 둔촌주공아파트의 마지막을 기록한 여러 작업물을 다시 호명해보기로 했다. 재개발 명령이 떨어졌을 때부터 아파트를 부수는 순간까지의 기록을 통해 낡은 집을 잘 보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사진, 책 등 다양한 형태로 선보인 애도의 중심에는 기획자 이인규가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 할머니, 오빠와 함께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혼자서 고양이 3마리와 그곳에 살았다. 둔촌주공아파트가 1979년 준공되어 2017년 재건축이 확정되었으니, 아파트의 생과 사를 조망한 셈이다. 그가 2013년부터 시작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는 집의 모습을 찍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5권의 프로젝트로 책을 발간한 것. 그중에서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와 ‘가정방문’의 협업으로 제작한 480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그 두께만큼이나 여러 가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다.

책에는 총 12가구 주민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둔촌주공아파트에 터를 잡고 오래 정주한 주민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으로 이사 와 ‘적응’하는 주민들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둔촌주공아파트를 향한 다양한 애증의 마음을 가능한 한 폭넓게 헤아리기 위한 의지가 엿보인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단지 설계나 온종일 빛이 잘 드는 구조 등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분명 누군가에겐 낡은 아파트가 지닌 불편을 감소해야만 하는 집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살면서 집하고 잘 안 맞아서 빨리 이사해야겠다는 사람들도 많고, 또 요새는 집을 경제적인 재화로 따지고 그래서 이사를 자주 해야 돈을 많이 번다는 게 풍토잖아요. (중략) 그 자체로도 집이 자기 역할을 정말 잘해준 거고, 무엇보다 귀한 걸 우리에게 해준 거로 생각합니다.”

-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X 가정방문> 인터뷰이 김채순, 함동산 -




한편 영화감독 라야는 누군가의 집에 찾아가 그 집을 영상으로 남기는 ‘가정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라야는 이인규의 집을 촬영했고 이를 계기로 둔촌주공아파트의 집을 하나의 시리즈로 촬영해 영화 <집의 시간들>을 제작했다. 영화는 집의 다양한 얼굴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한다. 화면에는 오로지 키 큰 나무와 어우러진 아파트 외관이나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방의 모습만 등장할 뿐이다. 주민들의 모습은 나오지 않고 집의 내면을 아는 데 도움을 주는 주민들의 이야기만 들린다.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이 집에서 보낸 중년 부부, 유년기의 따뜻함을 찾아 다시 살러 들어온 청년, 같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느새 함께 아이를 키우게 된 이웃까지 저마다의 이야기가 마치 앨범을 넘겨 보듯 천천히 관객을 사로잡는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세 번째 책 후반부에서 주민들이 모여 작은 행사를 벌이는데, 이 장면이 유독 애잔하다. 오래전부터 유명했던 거대한 크기의 기린 미끄럼틀이 있었다. 이 놀이터를 철거하는 날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불꽃놀이를 하면서 작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누군가는 기린 미끄럼틀의 콘크리트 파편을 기념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마치 어떤 사람의 부재를 오래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태도와 닮아 있다. 이와 비슷하게 한 주민은 이사할 때 집집마다 달려 있는 비상등을 가져갈 거라고 말한다. 어두워진 집에서 성스럽게 빛나던 등이 어떤 새로운 등보다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아파트 철거는 대개 포크레인으로 진행한다. 옥상에 포크레인을 올려놓고 한 층씩 깨부수며 바닥으로 밀어 보낸다. 작업이 완료되면 텅 빈 땅만 남게 된다. 영화에서 흔히 보듯 폭발물을 설치해 한 번에 무너뜨리는 일은 드물다. 오랫동안 집이었던 공간을 ‘보내주는 일’도 아파트를 철거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새집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할애해 집을 추억하고 서운한 마음을 한 겹씩 내려놓는 과정처럼 말이다.

앞으로는 점점 더 아파트가 고향인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그저 물적 욕망에 따라 쉽게 세우고 부수는, 수단의 개념으로부터 아파트를 구해야 할 때다. 나의 집과 나의 동네로서 한 아파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게 좋은 작별일 수 있을지, 나아가 지금 추구하는 주거 환경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다.




“이 동네는 재건축 얘기가 나온 지 17년이 지났으니까, 그동안 점점 더 소홀해졌을 것 같아요. 재건축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이 집을 더는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들이 좀 아쉬워요.”

-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 기획자 이인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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