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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다양성, 도시

목적지 대신 낯선 장소로 안내하는 지도

블루 크로 미디어

Text | Anna Gye
Photos | Blue Crow Media

내비게이션 앱에 밀려 종이 지도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하지만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한 독립 출판사 블루 크로 미디어는 건축, 디자인, 역사, 환경 등을 주제로 꾸준히 종이 시티 맵을 제작하고 있다. 각 도시의 컬러, 서체, 언어, 이야기로 채워진 지도에는 뻔한 여행지나 레스토랑 정보는 없다. 가야만 하는 목적지도 없다. 생활자조차 볼 수 없었던 도시 전체의 생김새와 스쳐 갔을 법한 낯선 장소로 안내한다.








최근 영국 런던의 독립 출판사 블루 크로 미디어Blue Crow Media는 독일 베를린 시티 맵 을 출판했다. 편집장 데릭 램버튼Derek Lamberton는 연간 5 3,000명이 이용하는 지하철 노선에 베를린에서 일어난 결정적 사건들을 담기로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베를린은 건축가들에 의해 현대적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도시라는 생태계가 만들어지자 사람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학문, 예술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통일 이후 베를린은 독일의 공식 수도가 된다. 이처럼 베를린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20세기 역사를 돌아봐야 할 터. 그렇다면 왜 지하철일까? “도시 역사와 지하철, 두 단어는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도시화 과정은 사회 기반 시설이 완성되는 과정과 일치해요. 대중교통 시설이 생기는 순서, 속도, 지역을 파악하다 보면 어떻게 베를린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알 수 있죠. 역 공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경제, 사회, 문화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 시설이 생기는 순서, 속도, 지역을

파악하다 보면 어떻게 베를린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알 수 있죠.”




베를린 건축 역사학자 페레나 파이퍼클로스Verena Pfeiffer-Kloss와 사진가 나이절 그린Nigel Green이 참여한 이 지도에는 1902년부터 2009년 사이에 지은, 중요 기점이 되는 50개 역이 표시되어 있다. 앞면은 지하철 노선도, 뒷면은 자세한 사진과 글로 구성되었다. 독일 대중교통 디자인에 스위스 건축가 알프레트 그레난더Alfred Grenander와 독일 건축가 라이너 게르하르트 뤼믈러Rainer Gerhard Rümmler가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라이너 게르하르트 뤼믈러는 특정 그룹을 묶을 수 있는 컬러 기호를 개발했는데, 이는 디자인과 교통 시스템을 연결한 시도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베를린에서는 그의 컬러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컬러풀한 모자이크 타일이 독특한 페르벨리너 플라츠Fehrbelliner Platz, 융페른하이데Jungfernheide역은 팝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장소다.










편집장 데릭 램버트는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컬러, 타이포그래피, 건축 소재에서 표지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랫동안 슈퍼그룹 스튜디오Supergroup Studios의 디자이너 야코 투오미파라Jaakko Tuomivaara와 작업했어요. 디자인 콘셉트를 잡기 전, 그 도시를 방문해 그곳에서 발견한 디자인 요소를 작업에 응용하죠. 도시명은 영문뿐만 아니라 그곳 언어를 함께 표기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도시, 사람, 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블루 크로 미디어는 2009년부터 세 가지 주제로 시티 맵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중교통 시리즈로 베를린, 런던, 모스크바, 뉴욕 등을 다뤘고, 나무 시리즈로 런던, 뉴욕, 파리를 출간했다. 건축 시리즈는 브루탈리즘, 아르데코, 콘크리트 등 소주제 아래 여러 도시가 함께했다. 건축 콘크리트 시리즈 중 일부로 서울도 다뤘으며, 평양 건축 지도를 출간하기도 했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소외된 것에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켜 살피고 보존해야 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어요. 북한 평양 프로젝트도 이런 맥락이죠. 정치적 시선을 거두고 건축가 시선으로 평양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발견하길 바란 거죠.” 그의 의도는 포토그래퍼 올리버 웨인라이트Oliver Wainwright가 촬영한, 고요하고 유쾌한 색감의 사진에서 더 잘 드러난다.










활짝 펼치면 420 x 594mm, 접으면 책 사이즈인 210 x 148mm의 지도. 앞면은 주로 도시 지형 그림이고 뒷면에는 큐레이션한 50여 곳과 물건의 이야기가 실린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큐레이션 과정이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정보를 바탕으로 현지인, 전문가 등의 인터뷰를 거쳐 출판사의 취향을 걸고 선택한다. 장소 리스트가 완성되면 직접 도시를 찾아가 취재하고 사진과 글을 정리한다. 영어권이 아닌 경우 반드시 그 지역 언어를 함께 표기하는데, 여행자보다 생활자들이 지도를 구입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해당 도시 거주자들이 지도를 접하고 큐레이션 장소를 직접 찾아보고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블루 크로 미디어의 시티 맵은 도시를 경험하는 새로운 포맷이라고 봐요. 책과 유튜브를 통해 도시를 보고 듣고 읽는 방식을 넘어, 펼치고 찾고 발견하는 재미를 더한 거죠.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수시로 펼칠 수 있고,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도시 분위기를 즐길 수도 있고요. 여행지나 맛집 정보는 없어요. 목적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길도 없죠. 여행자뿐만 아니라 생활자조차 볼 수 없었던 도시 전체의 생김새와 스쳐 갔을 법한 장소로 안내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목적지를 찾기 위해 지도를 꺼낸다. 내비게이션 앱도 마찬가지. 자신의 위치에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길을 잃을 때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법이죠. 도시 분위기는 건물 사이에 뜬금없이 나타난 골목, 간판 없는 가게, 일상의 풍경에서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어요. 방바닥에 종이 지도를 쫙 펼쳐놓고 보세요. 숲을 보듯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도시의 생김새가 보여요.”




도시 분위기는 건물 사이에 뜬금없이 나타난 골목,

간판 없는 가게, 일상의 풍경에서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어요.”

- 데릭 램버튼, 블루 크로 미디어 시티 맵 편집장 -




그는 지도라는 포맷 자체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즐기고 타 문화에 열려 있는 젊은 세대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자, 라이프스타일 카테고리와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 일자리, 세금 등 정치적 사안을 가볍게, 유쾌하게 담을 수도 있다. 현재 2022년 출간을 목표로 새로운 주제로 지도를 만드는 중이다. 블루 크로 미디어의 종이 지도는 여행을 재촉하기보다 머무는 삶과 즐거움을 천천히 느끼게 만든다. 낯선 도시를 발견하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면 자신의 동네와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내비게이션 앱에서는 지나쳤을 법한 골목도 한번 살펴보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사는 도시를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자신만의 큐레이션 리스트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 목적지 없는 지도를 즐기다 보면 삶이 재미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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