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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도시, 큐레이션

에드워드 호퍼가 ‘그 방’에 숨긴 것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전

Text | Kakyung Baek
Photos | SeMA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전시 중인 에드워드 호퍼의 개인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그의 대표작을 감상하다 보면 사람을 묘하게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공간들이 등장한다. 뉴욕의 방, 새벽의 레스토랑, 케이프코드의 박공지붕 집, 극장 등 그가 그린 공간에 나타나는 특징을 소개한다. 호퍼의 작품을 공간으로 읽는 색다른 감상법이 될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 ‘철길의 석양’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 그의 인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효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 20일까지 열리는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이 개최 전부터 국내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던 이유다. 호퍼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을 총망라한 이번 전시는 드로잉, 판화, 유화, 수채화 등 작품 270여 점을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집무실에 호퍼의 작품 ‘벌리콥의 집, 사우스트루로’를 걸어두고 감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적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빔 벤더스는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편의 누아르 영화를 제작했다. 호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당연히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호퍼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공간’에서 그 이유를 찾아봤다.




그의 그림 속 공간이 끌리는 것은 일상적 요소에 낯선 암시를 숨겨뒀기 때문 아닐까?”




미국의 유명 시인 마크 스트랜드는 그의 책 <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에서 호퍼의 공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호퍼의 그림은 사회상의 기록도, 불행에 대한 은유도 아니다. 또한 미국인의 심리적 기질 같은 어떤 조건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부정확하기는 마찬가지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호퍼가 그린 가상공간이 매력적으로 작동하는 몇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그림 속 공간을 구성하는 구도다. 스트랜드는 호퍼의 대표작인 ‘나이트호크를 통해 ‘호퍼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인 사다리꼴’ 구도에 대해 설명했다. ‘나이트호크’는 호퍼가 1942년 밤늦은 시간에 한 식당에 모인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식당의 유리 창문과 초록색 타일, 둥근 의자, 노란 불빛 등이 이루는 사다리꼴 구도는 작품 속 주인공을 식당으로만 제한하지 않는다. 이 구도는 식당이라는 공간으로부터 등장인물, 테이블, 의자 등 디테일한 요소로 시선이 흐르도록 만들며 동시에 관람객이 식당을 스쳐 지나가다 언뜻 맞닥뜨린 생경한 한 찰나로써 작품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사다리꼴 구도는 호퍼의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에드워드 호퍼, ‘오전 7시’




두 번째는 공간 속에 자연과 문명의 대립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작품 ‘오전 7시’에서 보이는 공간은 전시 기획 글에 따르면 뉴욕주 나이액에 소재한 주류 밀매 업소다. 흰색의 깔끔하고 단정한 건물과 대비되어 왼쪽에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표현된 숲이 있다. 어둡고 혼란스럽게 그려진 나무들은 꽤나 으스스한 모습인데, 인간의 질서로는 읽을 수 없는 자연과 문명의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비는 호퍼가 예전에 살던 동네와 집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호퍼는 허드슨강 인근 나이액에 살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고 문명과 자연의 대비라는 주제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호퍼가 당시의 집을 토대로 그린 대표적 작품인 ‘나이액 예술가의 침실에는 그의 자화상과 몇 권의 책, 노트, 스케치 등이 놓여 있다.





에드워드 호퍼, ‘계단’




그의 집을 모티브로 그린 또 다른 작품 ‘계단’에도 특유의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작품은 계단에서부터 내려오는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그 끝에는 미지의 숲이 있다. 숲의 방향을 따라 존재하는 계단의 손잡이, 활짝 열린 현관 등 집 안의 모든 요소는 관람객에게 숲으로 가라고 외치지만, 막상 숲의 기이한 장면을 마주하면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역설적인 찰나를 담고 있다. 호퍼가 그리는 공간은 이처럼 자연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익숙한 문명 사이에 존재하는 흥미로운 대립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는 곧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주요 매개가 된다.



세 번째는 빛의 서사다. 호퍼의 작품에는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가 주를 이룬다.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빛, 그림 속 등장인물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빛, 도심 속 건물에 노을이 짙게 깔리는 장면 등 그는 공간에서 빛을 연극적으로 잘 활용하는 손꼽히는 작가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1960년 케이프코드에서 그린 ‘이층에 내리는 햇빛’은 박공지붕 집 벽면에 하얗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한 햇볕이 내리쬐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




호퍼는 이 작품을 “노란색을 거의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햇빛을 흰색만으로 그려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라 소개한 바 있다. 뒤쪽의 어두운 숲과 대비되어 미스터리할 정도로 밝은 베란다에는 백발의 중년 여성과 금발의 젊은 여성이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빛의 서사만큼 흥미로운 두 인물의 서사가 자연스럽게 관람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떤 관계인지부터 시작해서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혹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등등 상상의 여지를 열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스트랜드의 표현처럼 관람객의 상상이 저편으로 도망치려 하면, 호퍼의 “그림의 기하학이 우리를 그림 속으로 불러들인다.” 명징한 선과 색으로 그려진 공간과 그 안의 서사가 서로 밀고 당기며 흥미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도시에 마천루가 들어서며 개발에 집중하던 19세기, 호퍼의 관심사는 하늘로 치솟은 스카이라인이 아닌 마천루 옥상의 모습, 강변에 늘어선 아파트, 고가 전철 안에서 내려다본 창밖 풍경 등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법한 순간이었다. 뉴욕의 방을 그릴 때도 공간을 장악한 인간을 그리기보다 그 안에서 마치 오브제처럼 골똘히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이름 없는 누군가를 그렸다. 그의 그림 속 공간이 끌리는 것은 일상적 요소에 낯선 암시를 숨겨뒀기 때문 아닐까? 그가 그린 공간에는 ‘확실히 있긴 하지만 절대로 단박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만 주목받는 시대에 그의 비밀스럽고 고독한 회화가 여전히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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