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통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백화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부유층의 절대적 공간에서 만인의 친근한 장소로, 고가 쇼핑에서 중저가 복합 쇼핑몰로 유연하게 진화했지만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온라인 쇼핑이 일반화되면서 폐점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백화점에 깃든 추억과 이야기 속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해러즈 백화점 내 프라다 카페 / ©StudioVF17
2022년 10월 영국 뉴스 매체 <가디언>은 ‘백화점의 종말’이란 기사를 냈다. 그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영국 대형 백화점의 83%가 문을 닫았고, 영국을 대표하는 백화점 존 루이스John Lewis 또한 셰필드Sheffield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 8개 매장을 추가로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1963년 처음 문을 연 백화점이 영업을 종료하자 동네 사람들은 건물 외관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머물 곳은 없지만 추억은 항상 간직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존 루이스 셰필드: 1963년 9월~2021년 6월’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제작했고, 기념일마다 가족과 함께 찾았던 추억과 꿈의 장소였던 백화점 자리에 문화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26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백화점 체인 시어스Sears, 미국 4대 백화점 중 하나인 메이시스Macy’s도 백기를 들었다. 320년 역사의 일본 야마가타현 오누마 백화점, 반세기를 이어온 시부야 명소 도큐 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백화점에 깃든 추억과 이야기 속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해러즈 백화점 내 프라다 카페 / ©StudioVF17
일찍이 급변하는 소매시장의 흐름을 읽어낸 영국 럭셔리 백화점 해러즈는 고유의 클래식은 잃지 않으면서 새로움을 더하기 위해 레노베이션을 감행했다. 요점을 말하자면 판매대로 가득한 쇼핑 공간에서 벗어나기로 한 것이다. 브랜드는 감추고 공간 분위기를 강조했다. 장르도 흔들었다. 뷰티 브랜드 틈에 샴페인 바가 자리하고 시계 매장 사이에 카페가 자리한다. 명품 브랜드를 미식과 혼합시켜 색다른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 해러즈만의 특기. 브랜드 100주년을 기념해 오픈한 프라다 카페,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마카롱, 에클레어 등을 판매하는 루이 비통 디저트 숍 등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팝업 매장이 수시로 열린다. F& B 디렉터 애슐리 색스턴Ashley Saxton은 <포브스>와 함께 한 인터뷰에서 27개가 넘는 레스토랑과 미식 팝업 매장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식사는 가장 보편적 행위이자 근원적 즐거움입니다. 편안하게 먹고 즐기기 위해 백화점에 가는 겁니다. 쇼핑을 권하지 않는 방식이 결국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죠.”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브랜드를 어떻게 입점시킬지보다 고객들의 체류 시간을 어떻게 더 많이 효율적으로 늘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 마이애미 등에 지점을 둔 쇼필즈Showfields는 큐레이션 전문 백화점이다.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은 ‘작지만 강한’ 독립 브랜드를 골라 소개한다. 14K 골드 주얼리와 펜던트를 조합해 자신만의 주얼리 세트를 만드는 브랜드 러브 웰드Love Weld, 콩고기 닭고기를 이용한 닭튀김, 닭볶음 요리를 소개하는 틴들TiNDLE, 절약형 샤워기와 샤워기 안에 삽입해 사용하는 에너지 부스터 등을 판매하는 하이Hai 등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신생 브랜드가 대부분이다. 매장은 브랜드를 창의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전시 공간처럼 연출했다. 오프라인 매장이 없던 브랜드는 백화점에서 직접 고객과 만난다. 구강 위생 브랜드 큅Quip의 매장은 고객 화장실이다. 고객들은 직접 칫솔, 치약 제품을 사용해볼 수 있다. 샤넬, 루이 비통 매장이 없어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매일 브랜드가 교체되는 ‘움직이는 백화점’이다.
스스로 ‘새로운 타입의 백화점’이라고 소개하는 네이버후드 굿즈Neighborhood Goods. CEO 매트 알렉산드Matt Alexande는 아무리 멋진 공간으로 만든다고 해도 백화점 수익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며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백화점이 아니라 사고 싶은 소수의 브랜드만을 다루는 ‘작은 백화점’을 지향한다. 네이버후드 굿즈는 백화점의 전형적인 B2B 구조와 유통 방식에서 벗어났다. 판매 대신 소매 인프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마케팅과 기획을 담당한다. 마치 액셀러레이터 기업처럼 스타트업 브랜드를 소개하고 성장시키는 식이다. 백화점에서 사용하고 경험한 후 주문하면 제조자가 바로 배달하는 D2C(direct to Customer) 구조를 취한다.
“인스타그램에서 화제를 모으거나 셀러브리티가 사용했거나 트렌드로 떠오른 브랜드에는 관심이 없어요. 스토리가 탄탄한 브랜드를 저희만의 관점으로 고릅니다. ‘잘 팔리는 브랜드’가 아니라 ‘잘 팔릴 수 있는 브랜드’를 함께 만드는 것이 저희만의 차별점이죠.” 그는 또한 백화점이 들어선 지역 내 커뮤니티를 만들고 지역민을 위한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써 동네 사랑방이 되고자 한다. 럭셔리 백화점이라고 콧대를 세우려는 기존 백화점과 달리 어떻게 하면 백화점 문턱을 낮출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자체 의류 상품뿐만 아니라 매거진, 팟캐스트 등을 통해 자체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것도 그 일환이다. 판매자가 아닌 소비자에게 무게중심을 두고, 늘 새롭고 놀라운 물건을 제안하고자 한다.
백화점이 살아남는 법은 백화점이라는 간판을 과감히 떼어버리는 일이다.
이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 제조사, 도매업자, 유통업자, 중간 상인, 구매자 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B2B 구조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백화점을 전문가들을 ‘하이브리드 백화점’이라 부른다. 국내에도 이런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백화점이 쇼핑 매장 대신 전시 예술 공간이나 자연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친환경 공간으로 채우거나 미식, 예술 체험, 호텔 숙박까지 제공하는 복합 상업 시설로 변모하는 중이다. 하지만 백화점이 살아남는 법은 백화점이라는 간판을 과감히 떼어버리는 일이다. 작지만 알찬 구조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 논리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백화점은 ‘다른 소매 매장과 어떻게 경쟁해서 살아남을까’라는 질문 대신 사람들이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를 고민하는 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명백한 것은, 무엇이든 구입할 수 있는 백(百)화점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남다른 개성을 가진, 앞서가는 백(伯)화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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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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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조너선 도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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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나보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