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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과시하는 가구, 책장

책장, 서재

Text | Shin Kim

서재는 집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곳일까? 서재란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곳이다. 그런 공간이 별도로 필요할까? 공간의 여유가 있다면 물론 서재를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밀도 높은 도시에서 큰 집을 갖기 힘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서재란 사치스러운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직장인들은 대개 집에 오면 TV를 보거나 쉬지, 책을 읽는 경우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재에서’, 요한 함자Johann Hamza, 19세기 말.




서재는 부잣집에서나 구현되는 공간이다. 크지 않 집에서는 서재를 꾸밀 만한 여유가 없지만, 서재를 대신하는 것이 있다. 바로 책장이다. 내 집에도 서재는 없지만 거실에 커다란 책장 놓아 서재의 결핍을 보충하고 있다. 거실을 서재 겸 휴식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가끔 손님이 찾아오면 거실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을 보며 하는 질문이 있다. “이 책 다 읽었어요?” 나는 이 질문이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도 다른 집을 방문했을 때 책으로 빽빽한 책장을 보면 그런 질문을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런 질문이 하고 싶을까?




책장은 다른 어떤 가구보다도 책으로 자랑하는 가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건 뭔가 그 사람이 보통 이상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책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지적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책을 읽는 일은 강력한 의지와 고도의 집중을 요구한다. 독서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더욱 책 읽 시간 줄었고 문장을 해석하는 능력도 퇴화하고 있다. 따라서 그 많은 책의 주인이 정말로 그걸 다 읽었다면 존경할 만한 일이다. 반대로 별로 읽지 않았다면 책으로 빼곡한 책장은 그저 허세일 뿐이다. 바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집 안을 채운 수많은 책이 그저 허세로 판명된다면 그 집을 방문한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자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2017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벨에게 서재를 소개하는 장면.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야수는 붙잡혀온 미녀 벨이 독서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다. 점차 벨의 따뜻한 마음에 야수는 마음을 열게 되고 독서광 벨을 기쁘게 해줄 이벤트를 마련한다. 눈을 감도록 한 채 벨을 어떤 방으로 이끈다.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눈을 떠보라고 한다. 벨이 눈을 떠보니 그 방은 야수가 사는 성의 서재다. 이 엄청나게 높은 거대한 서재는 벽마다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들로 꽉 차 있다. 서재라기보다 도서관에 가깝다. 벨은 무수히 많은 책을 보고 감동한다. 이때 벨이 야수에게 묻는다. “정말로 이 책들 다 읽었어요?” “아니, 전부 다 읽은 건 아니야. 그리스어로 된 책들도 있거든.” “농담이죠?” “아마도.



벨은 야수가 외국어로 된 책만 빼고 그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대답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농담이 아니냐고 다시 반문했고, 야수는 ‘다행히도’ 그렇다고 답변한 것이다. 이때 벨은 안심이 된다는 듯 웃는다. 만약 야수가 그 많은 책을 다 읽었다면 벨은 야수와 더 가까워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솔직한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우월한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1977 <야행>은 당시 강남에 대규모로 지 반포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서양의 대저택에는 이렇듯 책로 빼곡한 서재가 반드시 있다. 그것은 그림과 조각품이 있는 갤러리(손님들에게 개방된 복도나 홀 공간)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손님들의 기를 죽이는 것이다. 갤러리의 회화와 조각이 예술성과 재산을 과시하는 것이라면, 서재는 지적인 면모를 과시해서 손님들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열등감까지는 아니어도 자랑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 이촌동의 한강맨션, 반포동 주공아파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대치동 은마아파트, 잠실 주공아파트 등 한국에는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 들어섰다. 수백 수천 세대의 집이 생기면서 거실이라는, 전통 주택에서는 없던 새로운 공간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거실에는 책장이나 장식장이 놓였고 그런 가구의 수요가 폭발했다. 문제는 그곳을 채울 책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엄청나게 팔렸다. 어느 정도냐 면 이 백과사전을 판매한 한창기라는 세일즈맨이 전 세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 1위를 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잘살지도 못하던 시절에 미국에 본사를 둔 전통의 백과사전이 한국에서 제일 많이 팔린 것이다. 그것도 한글로 번역된 책이 아니라 영어 원서가. 그렇다면 이 백과사전을 책장에 꽂아는 용도가 분명해진다. 집을 지적으로 꾸며준 것이다. 백과사전을 구매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때 한국 출판사들의 전집류 발행이 유행했다. 전집은 새로 산 책장을 한번에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가장 빨리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전집을 사서 꽂는 것이다. 그런 책장의 모습은 책등이 비슷해서 균질해 보인다. / Jens Mohr




그러니 어떤 집에 가서 책으로 가득한 거대한 책장을 보고, 그 집주인이 그 책들을 다 읽었는지 궁금하더라도 결코 질문할 필요가 없다. 다 읽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분명하고, 읽지 않았다면 그 책들의 기능이란 그저 지적 장식품이라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읽히지 않고 책장에 조용히 꽂혀 있는 시간이 훨씬 길다. 그러니 그것의 진정한 기능은 장식인 것이다. 그것이 주인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주고 손님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사게 했다면 읽히지 않더라도 그 구실을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너무 속되다고 판단한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책은 그것이 읽힐 잠재적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주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어쨌든 책장은 다른 어떤 가구보다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 즉 책으로 자랑하는 가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디자인하우스 월간 디자인기자를 거쳐 최장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다양한 미디어에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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