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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재생, 프리미엄

종이를 접고 펼치고 자르는 갤러리

종이 전문 갤러리 칼리그라네

Text | Anna Gye
Photos | Mineun Kim

1979년 프랑스 파리에 설립한 종이 전문 갤러리 칼리그라네. 금처럼 반짝이는 특수 종이, 검푸른 컬러를 띠는 옻칠 종이, 과일 껍질로 만든 파피루스, 그리고 기발한 종이 공예 작품 등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색다른 종이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어머니가 하던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는 바네사 바트Vanessa Barth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디지털 시대를 위한 종이를 소개하고 있다.








사각사각, 반짝반짝, 팔락팔락, 부스럭부스럭.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종이 전문 갤러리 칼리그라네Calligrane에는 음악 소리 대신 종이를 접고 펼치고 자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검은 책장, 테이블, 선반 사이사이,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한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 각양각색의 종이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발자국 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종이에 다가간다. 칼리그라네는 1979년에 탄생했다. 설립자 아나 바트Ana Barth가 프랑스 남부 도시 칸에 첫 매장을 열었는데 당시에는 종이로 만든 노트, 앨범, 서적 등을 판매하는 문구점에 가까웠다. 디지털이 급부상하던 시절에도 칼리그라네는 나름 번성해 프랑스 내에 파리를 포함 총 4개 매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2011년 아나 바트가 갑자기 사망한 후 칼리그라네는 폐업 위기에 처했다.




“노트, , 앨범이 아닌 종이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 나이가 마흔이었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무척 당황했어요. 무엇보다 어머니의 청춘이, 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매각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제가 열 살 때 이 가게를 오픈했는데 이곳에서 보낸 추억이 생생해요. 하교 후 여기서 종이를 만지며 시간을 보냈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친한 친구를 불러 아르바이트로 함께 선물 포장을 했죠. 저는 아날로그 추종자도, 외골수 장인도, 치열한 독서가도 아니지만 종이를 버릴 수 없었어요. 제 눈에만 보이는, 종이 한 장 한 장에 ‘엄마’라는 글자가 진하게 적혀 있었거든요. 그리운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서 이 가게를 직접 운영해보자 마음먹었죠. 벌써 12년이 흘렀네요.










쾌활하고 적극적이었던 어머니와 달리 바네사 바트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좀 더 맞게 비즈니스를 이어가고자 아티스트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 종이 전문 갤러리 전향했다. “기록을 넘어 또 다른 용도, 감각, 경험을 줄 수 있는 종이. 노트, , 앨범이 아닌 종이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아티스트나 장인이 직접 만든 종이는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지 않아도, 비어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어요.



이탈리아 베니스에 살고 있는 아티스트 리타 포르Rita Fortin 자연의 재료로 종이를 염색한다. 은은한 색감은 물론 푸른 이끼, 풀 내음이 난다. 가죽, 콘크리트 같은 거친 질감을 입히기도 한다. 연근, 오이, 순무, 가지 등 각종 채소를 포 떠서 말린 후 고대 파피루스 제작 방식으로 만든 흥미로운 종이도 있다. 일본에서 종이를 수입하기도 하는데, 다다미 방을 도배할 때 사용하는 와시, 닥나무 종이에 옻칠해 방수 효과가 있으며 거뭇거뭇한 표면이 특징인 우루시, 다른 종이와 달리 앞뒤 모양이 같고 반투명한 이노시도 있다. 이 외에 100% 친환경 방식으로 만든 천연지, 사진작가들이 사용하는 배경지 등 특수 종이를 취급하는 곳으로는 파리에서 거의 유일하다.



“어느 날 명함을 받았는데, 스탬프로 찍힌 핸드폰 번호가 전부였어요. 하지만 어떤 취향의 사람인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죠. 물에 젖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는, 촉감이 남달라 오래 간직하고 싶은 수제 종이로 된 명함이었거든요. 때론 당신이 건넨 명함, 카드 한 장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어요.” 문자에는 감정이 없지만 종이 위에 쓴 글자에는 감정과 온도가 새겨진다.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쓴 희미한 흔적, 소중해서 한 번 더 읽으려고 고이 접은 귀, 마음 깊이 새기고 싶은 글귀에 친 밑줄. 칼리그라네는 명함, 카드, 노트, 앨범 등을 만들어주는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도 제공한다.










“디지털을 몰아내고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전자책을 읽어요. 웹사이트, 인스타그램으로 고객들과 소통하고 있죠. 제가 갤러리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날로그, 핸드메이드, 친환경이라는 덕목 외에 종이가 품은 무한대의 가능성입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종이를 간직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설명하는 종이의 가치를 간추리면 이렇다. 종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정신 그 자체다. 종이는 보존성이 있다. 유명 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는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디지털은 정보를 찾고 순간을 포착하는 데 능숙하지만 금세 휘발된다. 사람들은 언제 꺼내 볼지 모르지만 그 순간을 오래 박제하고 싶을 때 종이를 찾는다. 종이는 침투력이 있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성을 가진 민주주의적 재료가 바로 종이다. 종이는 감정을 담는다. 손 편지를 생각해보라. 손 편지에는 절절하고 따뜻한 마음이 배어 있어 마음으로 쉽게 다가온다. 종이는 가변성이 있다. 종이와 종이가 만나면 나무판처럼 단단해지고 이를 이용해 가구도 만들 수 있다. 종이를 접으면 그릇이 되고, 펼치면 벽지로 사용할 수 있다. 가죽 같은 질감이 있는 종이를 이용해 만든 가방도 있다. 종이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아티스트 앙토냉 앙질Antonin Anzil은 종이의 두께감을 이용해 종이로 추상 작품을 그렸고, 이시이 가쿠코는 종이를 돌돌 말거나 매듭을 만들어 다양한 오브제를 만든다. 주니어 프리츠 자케Junior Fritz Jacquet의 펜던트 작품처럼 멋진 인테리어 소품도 될 수 있다. “여기 쇼윈도에 있는 신발 보셨어요? 뽕나무의 섬유질을 길게 뽑아서 만든 특수 종이로 만들었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요. 종이 공예품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종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실하게 깨뜨릴 수 있는 작품을 먼저 소개하고 싶어요.










말하고 싶은 종이의 매력은 이렇게 끝이 없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도 많다. 민주주의적 재료인 만큼 가격에 대한 일종의 저항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의 공예 작품이라고 해도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이 드물고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부정적 편견도 존재한다. “매일 조용한 하루로 채워질 것 같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이 순식간에 밀려들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올해가 작년보다 더 힘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어머니와의 작별이 어려워서 폐업을 망설였지만 지금은 원한다면 훌훌 털고 가볍게 떠날 수 있겠죠. 하지만 쉽게 단념하지는 않을 거예요. 종이는 분명 문자를 대체하는 영상의 시대에도 살아남을 겁니다. 인류 역사가 종이에 담겨 있잖아요. 이제 종이 위에 ‘엄마’라는 글자 대신 제 신념과 철학이 너울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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