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주방을 독차지했던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가구가 전환기를 맞았다. 코로나19 이후 소독 방역이 중요해지면서 청소하기 쉽고 내구성과 실용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가 떠올랐고, 요리는 안 해도 전문가 주방처럼 꾸미고 싶은 욕망이 늘었다. 디자이너들의 번뜩이는 재능이 더해지면서 식당 주방의 느낌과 비슷했던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가구가 미니멀리즘, 타임리스, 친환경 디자인 가구로 재탄생하고 있다.
주방 레노베이션 전문 브랜드 리폼의 ‘리플렉트’가 적용된 주방 모습 / ©Reformcph
스테인리스 스틸은 우연의 산물이다. 1912년경 영국 브라운 퍼스Brown Firth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해리 브리얼리Harry Brearley가 산책하다 우연히 빛나는 쇳조각을 발견했다. 그런데 오래된 금속임에도 조금도 녹슬지 않은 것에 의문을 품고, 철과 크롬을 일정한 비율로 합금할 경우 녹이 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13년 <뉴욕 타임스>는 ‘녹슬지 않고, 얼룩지지 않으며, 변색되지 않는 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철보다 가벼운 것은 물론 크롬, 니켈 등과 합금하면 내구성, 내열성(1200℃ 이상 견딘다)도 강해진다. 세균 번식을 막는 탁월한 성질 때문에 등장하자마자 건축, 기계, 자동차, 선박, 의료 기기는 물론 주방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1930년부터 스테인리스 스틸이 주방에 사용됐지만 선반, 조리대, 싱크대 등 주방 전체로 확장된 것은 한참 후인 1990년대경이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차갑고 멸균, 살균 이미지를 연상시키기에 주방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퓨처리즘 트렌드가 떠오르고 셰프를 주인공으로 한 TV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스테인리스 스틸 캐비닛, 카운터톱, 싱크대 같은 주방 가구와 가전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외식이 대중화되고 주방과 거실이 통합되면서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에 대한 호감도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요리하지 않아도 주방 분위기와 조리 도구만큼은 전문가처럼 꾸미고 싶은 욕망이 늘고 있다.
그런데 한때 유행했던 트렌드가 왜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일까. <아키텍처 다이제스트Architectural Digest>는 이를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소비, 욕망, 습관 외에 맥시멀리즘, 레트로 열풍과도 관계가 있다고 해석했다. 코로나19 이후 소독 방역이 중요해지면 청소하기 쉽고 내구성과 실용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가 떠올랐고, 요리하지 않아도 주방 분위기와 조리 도구만큼은 전문가처럼 꾸미고 싶은 욕망이 늘고 있다는 것. 가족 구성원 누구나 부엌에서 일하고 간편식 요리를 즐기게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이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주방이 필요해진 점도 핵심이다. 누구나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 스타일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우드, 대리석 등 천연 재료와 어울리며 미니멀리즘, 타임리스 디자인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최근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도 이사하면서 주방을 온통 스테인리스 스틸 가구로 채웠다. 요리에 진심인 그는 모든 주방 가구를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맞추고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부엌으로 사용한다.
Instagram@lacornueofficial
“코로나19 이후 이제 더 이상 집에서 일하고 요리하고 운동하지 않지만 사람들과 아늑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누군가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이 중요해진 거죠. 따라서 거실 중심이었던 집 구조가 전환되고, 주방이 점점 레스토랑이나 바 같은 분위기로 변신하고 있어요.” 인테리어 디자이너 닐 벡스테트Neal Beckstedt는 최근 뉴욕 어퍼웨스트사이드 지역의 고급 아파트를 디자인하면서 외딴 섬 같은 공간 대신 햇빛 가득한 창가 자리에 주방을 배치하고 스테인리스 스틸 캐비닛, 카운터톱은 물론 오븐, 스토브, 냉장고 등 스테인리스 스틸 가전제품으로 주방을 채웠다. “펜트하우스에 사는 이들은 전문 셰프를 불러 파티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문적이면서 인테리어로도 만족하는 고급 주방 가구를 택합니다.” 미슐랭 셰프 알랭 파사르Alain Passard, 미셸 로스탱Michel Rostang 등이 선호하는 브랜드로 유명한 라 코르뉴La Cornue는 장인들이 스테인리스 스틸을 바탕으로 황동, 구리 등을 이용해 만드는 주문 제작 방식을 취한다. ‘억’ 소리 나는 가격대지만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리폼의 ‘리플렉트’가 적용된 주방 모습 / ©Reformcph
<리빙 엣 세터러Living etc>는 2024년 주방 트렌드를 소개하며 #스테인리스스틸 키워드를 언급했다. 하지만 기존의 스테인리스 스틸과는 다른 소재로 설명한다. “번쩍이는 광택 효과와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주방에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지문도 잘 찍히고 말이죠. 오늘날 제조업체들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새롭게 가공해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있죠. 따뜻하고 온화한 금속으로 거듭나고 있어요. 덕분에 인테리어 자재로도 폭넓게 사용하고요.” 표면을 부드럽게 깎아내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브러시트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강철, 황동, 구리 등 다른 금속과도 매끄럽게 매치되고 지문 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탁월한 강점이 있다. 표면에 일부러 흠집을 내거나 또는 매끈하게 다듬는 식으로 질감과 비주얼을 더한 스테인리스 스틸을 선보이고 있다.
주방 레노베이션 전문 브랜드 리폼Reform이 제작한,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 디자인의 ‘리플렉트Reflect’는 수직 돌기 표면을 적용한 것이다. 거울같이 빛나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주방에 적용하면 공간이 넓어 보여 좁은 아파트에 효과적이다. 무미건조한 특성을 뒤집어 부드러운 입체감을 더하는 동시에 적절한 반사광으로 조리 공간을 주목하게 만든다. 주방 천장과 바닥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마감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아일랜드 테이블에 적용해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케아는 보르스타Vårsta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라인으로 각각의 공간에 알맞은 크기의 테이블을 직접 제작할 수 있도록 한다.
이케아의 ‘보르스타’가 적용된 주방 모습 / ©Ikea
코로나19 시대에는 집을 동굴처럼 사용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집은 햇빛 가득한 정원에 비유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또는 사람들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열린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간에 따라 각각 다른 가구를 배치했지만 기능이 통합된 가구가 늘면서 공간도 섞이고 있다. 호주 멜버른에 있는 마치 스튜디오March Studio의 건축가 로드니 에글스턴Rodney Eggleston은 건물 외관에 등장할 법한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하면 집 안팎의 경계가 없어진다고 강조한다. 거실과 주방 사이 인서트 공간에 사용하면 공간 사이의 경계 또한 흐려진다. 그는 따뜻하고 온화한 금속을 이용해 공간의 기능과 용도를 뒤흔든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용하면 레스토랑이나 호텔 등 상업 공간 같은 분위기가 납니다. 외부 에너지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죠. 요즘 사람들에게 집은 의식주를 벗어난 창의적인 공간이 되어야 하죠.”
대다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가 주방을 너머 집 전체로, 장식적 소재로 각광받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사람들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매물이나 재산이 아닌 소유와 만족을 위한 집을 생각한다. 오래 사용할 수 있고 보존할 수 있는, 수명이 긴 집.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집에 대한 바람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열풍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100% 재활용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다시 불고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트렌드는 이렇게 지속 가능한 건축, 친환경 디자인과도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