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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라이프스타일, 노마드, 힙스터

사적인 기념품의 전당

아티스트 권은진

Text | Bora Kang
Photography | Siyoung Song

얼마 전 경리단길로 이사한 그의 집에는 여행지에서 챙긴 영수증과 비닐봉지 따위가 편편이 보관되어있다. 소박하지만 강력한 힘을 간직한 채.







“소박한 기념품의 힘이 거대한 기념비보다 강력하다.”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 <향기 어린 악몽>에 나오는 대사다. 사키 saki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권은진은 매일의 일상에서 수집한 재료로 아름답고 실용적인 물건을 만든다.




“요즘은 집이 아무리 좋아도 전망이 건물에 가로막혀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 집은 밖이 온통 나무였어요. 동네도 조용해서 작업하기 좋아 보였고요.”




아침에 보자고 하셔서 의외였어요. 작가들은 보통 오후에 만나길 원하거든요. 대부분 밤에 일하니까요.

제가 막 영감에 사로잡혀서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하기도 해서, 새벽에 자더라도 웬만하면 아침 8~9시에는 일어나는 편이에요.



올해 초 이 집으로 이사 왔다고 들었어요. 연식이 꽤 오래된 맨션인데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나요?

일단 주인이 수리를 다 해놔서 딱히 손볼 데가 없었고요. 둘째로는 전망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집에서 보내는 터라 창밖 풍경이 정말 중요했거든요. 요즘은 집이 아무리 좋아도 전망이 건물에 가로막혀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 집은 밖이 온통 나무였어요. 동네도 조용해서 작업하기 좋아 보였고요. 바로 옆에 고등학교 건물이 있는데 실제로 일하다 보면 체육 시간에 애들 운동하는 소리가 들려요. 평화로운 배경음악처럼요.



나무로 된 천장도 무척 근사해요.

그것도 이곳을 택한 이유 중 하나예요. 작업실을 겸할 예정이라, 가정집이지만 스튜디오 느낌이 나는 공간을 원했거든요. 동시에 약간 별장 같은 분위기가 풍겼으면 했는데 이 집이 딱 그랬어요. 근데 놀러 온 친구들이 무슨 에어비앤비 같다고. (웃음)








작업실을 따로 쓰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실은 지난해까지 따로 쓰다가 집을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합쳤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마땅한 작업실을 못 구해서요. 겪어보니 둘 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작업실이 있으면 일과 일상을 엄격하게 분리할 수 있고 반대로 집에서 일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요.



집이 지저분하다고 민망해하셨지만 전 너무 정돈되지 않은 이 상태가 오히려 멋있게 느껴져요. 주인이 좋아하는 물건들로 가득한, 잡지 <아파르타멘토>에 나오는 집들처럼요.

좋게 포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아마 개인적인 취향일 텐데 제가 깔끔하고 모던한 스타일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뭐든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기도 하고, 세련된 작업은 하고 싶어도 못하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집이 당신 작품과 많이 닮았어요. 어린아이가 한 낙서처럼 즉흥적이고 낙천적인 느낌이요.

인터뷰하면서 그런 피드백을 많이 받는 편인데요. 내가 가진 추한 부분이나 좋지 않은 에너지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가진 것 중 예쁘고 기분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전 낙천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예민하고 내성적인 편에 가깝죠.








“저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굉장히 길고 지루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운동 가는 길이나 슈퍼 가는 길에 늘 똑같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런 풍경조차 매일 조금씩 달라요.”




수비니어 패브릭 시리즈를 중심으로 다양한 콜라주 작업을 전개하고 있어요. 영수증, 무가지, 티켓, 비닐봉지 등 여행길에 모은 사소한 물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여행 갈 때 재료 수집을 염두에 두고 가시나요?

그런 적도 있는데 경험상 너무 작정하고 가면 작업이 잘 안 풀리더라고요. 뭐든 자연스럽게 쌓여야 나중에 밑거름이 되는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든 그날 그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죠. 그 대상이 여행지가 될 수도 있고 제가 사는 동네가 될 수도 있고요.



일상에서는 주로 어떤 방법으로 영감을 얻나요?

여행이랑 똑같아요. 눈에 띄는 게 있으면 촬영하고 예쁜 게 있으면 주워오고. 저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굉장히 길고 지루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운동 가는 길이나 슈퍼 가는 길에 늘 똑같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런 풍경조차 매일 조금씩 달라요. 못 보던 물건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눈에 띄는 것들을 조금씩 기록하면서 일상의 아카이브를 쌓는 것 같아요.



당신이 직접 쓴 작가 소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개인적인 영감을 바탕으로 아름답고 실용적인 물건을 만듭니다’라는 문장이었는데 ‘실용적’이라는 표현을 쓴 게 독특했어요.

사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전까지 패션 브랜드 MD로 오래 일했어요. 그래서인지 시각적인 작업을 실용적인 매체로 구현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패브릭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행주로 써도 되고, 벽에 걸어놔도 되고, 사용자에 따라 쓸모가 다양해지니까요. 사키 saki도 원래는 브랜드 레이블로 만든 이름이었어요. 제 손으로 만든 상품을 소량으로 팔아볼 생각이었는데 막상 상품보다 그 상품을 위한 비주얼 작업이 더 주목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처럼 쓰게 됐죠. 최근에는 패턴 작업으로 가방을 제작했는데, 그렇게 작업이 상품으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더라고요. 작업 규모가 더 커지면 제대로 된 굿즈를 한 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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