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세밀화가가 일궈낸 8평짜리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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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세밀화가가 일궈낸 8평짜리 숲

식물 세밀화가 이소영

Text | Young-eun Heo
Photos | Hoon Shin

식물 세밀화가 이소영의 작업실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리고 모은 식물 세밀화와 식물표본,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은 식물 관련 책과 굿즈들이 진열되어 있다. 각 오브제에 담긴 사연을 들으면 30㎡도 안 되는 작은 작업실이 갑자기 거대한 자연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이소영 작가는 자신이 만나고 관찰한 식물처럼 꾸준히,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식물 세밀화를 처음 접하는 분도 많을 거예요. 정확하게 식물 세밀화는 어떤 그림인가요?

우리나라에선 식물 세밀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식 은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이에. 식물종을 관찰해서 그 형태와 특징을 정확하게 그려 기록하는 그림으로, 과학 일러스트레이션에 속해요. 식물 세밀화를 가장 가깝게 만나볼 수 있는 식물도감이.








식물 세밀화를 그리려면 식물의 작은 부분까지 자세히 관찰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식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것 같아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광릉수목원에 가는데, 갈 때마다 풍경이 새로워. 식물은 계속 변하거든요. 심지어 아침과 점심의 모습이 달라요. 식물 세밀화가의 역할은 시시각각 모습이 변하는 식물을 관찰하고 그 순간을 기록하는 거예요. 식물을 관찰하면서 얻은 정보 데이터가 되고, 그것이 쌓여야 식물 세밀화가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래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자연으로 나가서 식물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럼에도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죠. 작업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가요?

거의 집과 같아요. 외부에서 조사하고 들어오면 힘드니까 누워 쉬기도 하고, 작업하다 바쁘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작업실에서 자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식물에 대한 고서, 식물표본 등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어요.








작업실 곳곳 그동안 수집한 책과 굿즈로 가득하네요.

한국은 식물 세밀화가 아직 시작 단계라 를 활용한 책이나 상품이 다양하지 않아요. 그래서 수백 년 전에 나온 책이나 다른 나라에서 출시 굿즈를 보면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죠. 식물 세밀화는 클래식하고 보수적인 작업이라 식물 세밀화를 활용한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고, 그런 작업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해요.




식물을 보면서 억지로 나를 드러내고 빛나게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식물 세밀화와 식물에 대한 책을 출간하고, 강연도 하고, 칼럼을 기고하기도 하죠. 식물 세밀화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식물 세밀화가 앞으로 나아가고 확장되도록 하는 일에 재미를 느껴요. 게임이나 K-처럼 식물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서 식물 세밀화를 발견하면 짜릿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식물 세밀화는 연구 기관에서 의뢰가 들어와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요. 식물 세밀화 분야가 성장하고 더 많은 후배 양성되려면 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식물 세밀화가가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나라 자생 식물을 기록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되면 국내 식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많이 쌓이니까 식물학 발전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작년 여름에 출간한 <식물과 나>에서는 식물과 사람의 관계를 중점으로 다뤘죠.

최근 중장년층, 노년층뿐 아니라 청년층도 식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식물 문화가 확산되는 건 좋은 현상이에요. 하지만 식물을 유행처럼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경향도 아졌어요. 중요한 건 식물은 우리처럼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점이죠. 그래서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는 식물과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고, 생물로서 식물을 동등하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책에 담어요.








코로나19 사태 이후 식물을 기르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자신을 ‘식물 킬러’라고 부르는 사람도 존재하죠.

식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는 분에게는 식물을 동물처럼 생각해보라고 말씀드려요. 반려동물을 입양할 때 그 동물에 관한 기초 지식을 공부하면서 철저히 준비하잖아요.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물을 옆에 둔다는 건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일이니까요.



신기하게도 어르신들은 시들어가는 식물을 살려내잖아요.

그분들과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어요. 바로 자연에 대한 경험치예요. 부모님 세대까지는 일상에서 자연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 기본 지식이 있어요. 반면 학교 운동장이 인조 잔디로 깔려 있고, 식물을 보려면 일부러 식물원을 찾아가야 하는 젊은 세대는 식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죠. 자연 속에서 나무가 3m까지 자라는 걸 눈으로 본 사람과 도시에서 조경으로 다듬어진 나무만 보고 자란 사람도 식물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어요.








그렇다면 식물을 어떻게 대해야 인간과 식물이 잘 공존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쉬운 첫걸음은 식물 이름을 아는 거예요. 이름을 알면 원산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고, 원산지를 알면 식물이 잘 자라는 환경 조건을 알게 돼요.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위에 강하듯이 식물도 원래 자라던 곳의 환경에 잘 적응하는 기질 있어요. 그리고 농촌진흥청, 국립수목원 같은 기관에서 제공하는 정보 참고하면 식물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공존한다는 건 서로 영향을 끼치는 관계가 되는 거죠. 식물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사람도 식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죠.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기후변화예요. 기후변화로 인해 개화 시기, 개엽 시기, 결실 시기가 빨라지고 있어요. 식물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꽃과 잎, 열매를 맺는 시기로 자신의 상황을 나타내. 즉 식물도 지금 혼란을 겪고 있다는 증거죠.





진노랑상사화, 사진 제공: 이소영




식물을 매일 관찰하다 보면 여기서 배우는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식물은 생애 주기가 짧아요. 봄에 잎과 꽃을 틔우고 여름에 자라서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휴면에 들어가. 이 과정을 1년 단위로 반복하기 때문에 엄청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해요. 그래서 식물은 제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도 묵묵히 자 할 일을 하고 있어요. 매 순간 자라고 변하는 식물을 보면서 그동안 나는 뭘 했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삶의 태도를 배우기도 하죠.








식물을 통해 배운 삶의 태도가 있나요?

묵묵히 자 할 일을 하는 식물을 보면서 억지로 나를 드러내고 빛나 보이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즘은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고 자기 PR이 중요하다 보니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강요받는 듯한 느낌이 있잖아요. 순간의 기쁨만을 향유하다가 진정한 걸 놓칠 때도 있고요. 그런데 식물 함께 있다 보면 꾸준히,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배우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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