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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다양성, 반려동물

책과 함께 사는 역사해설가의 집

안지영 역사해설가

Text | Solhee Yoon
Photos | Sung Veen Kim
Film | Taemin Son

대학교에 진학하며 자연스레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안지영은 12년 만에 경기도 고양시 부모님 집 근처에 집을 구했다. 마침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기에 '한 번쯤은 가까이 살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희망과 반려묘를 위해 볕이 잘 들고 늘어가는 책을 수납할 거실이 넓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망이 더해져 실행한 일이다. 더욱 머물고 싶은 집에 새 베이스캠프를 차린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행신역이 지척에 있네요. 어떻게 이 동네로 이사 오게 됐어요?

여기서 초..고를 다 나왔어요. 저에게 고향인 셈이죠. 부모님 집, 동생 집과도 아주 가까워요. 대학교 들어간 뒤로 내내 서울에 살았는데 코로나19 시기에 가족들 곁에서 살아보자 싶어서 돌아왔어요. 코로나19로 온 가족이 큰 난리를 치르며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거든요. 이번엔한 번쯤은 가까이 살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엄마의 말이 가볍지 않았죠. 마침 살고 있던 집 계약 기간이 끝나갈 때였어요. 서울에서 고양으로 옮기면 같은 금액에 더 쾌적한 환경의 집을 구할 수 있으니 괜찮은 선택이었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고요?

그럴리가요. 한번 나왔는데 다시 들어갈 수는 없죠.(웃음) 따로 산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걸요. 자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제 짐은 한 방이 아니라 한 집을 차지할 만큼 많고 또 반려묘 탱고가 있으니까요. 엄마가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털 날리는 걸 싫어하셔서 함께 살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또 저희 집에 오시면 멀찍이 서서 “탱고야~” 하며 부르며 귀여워하세요.




집을 일의 시작점이라고 생각. 새로운 일을 의뢰받으면 이곳에서 기초를 만들어 바깥으로 보내니까요.”




아는 동네니까 집 보러 이곳저곳 많이 다녔을 것 같은데 이 집은 어떤 면에서 좋았어요?

가장 중요한 조건은 고양이와 살아도 된다는 집이었어요. 집주인이 흔쾌히 허락해주더라고요. 그리고 볕이 잘 드는 창가와 책장을 여러 개 둘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이 있을 것. 이 집은 남향에다 거실과 그 양옆으로 방이 있는, 그러니까 짐 많은 제가 반려묘와 함께 살기에 충분한 환경이었죠. 방과 거실에 큰 창이 있어 볕이 잘 들고, 작은 발코니도 있어 탱고가 밖을 내다볼 수 있어요. 게다가 거실 천장과 붉은 벽돌 벽이 특이해서 달리 인테리어를 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가구를 배치할 때 신경 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바깥에서 일하는 시간만큼 길어요. 그래서 집을 일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새로운 주제나 테마의 일을 의뢰받으면 이곳에서 기초를 만들어 바깥으로 보내니까요. 그런 면에서 집은 베이스캠프나 마찬가지라 집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게 만들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어요. 저는 이것저것 자료를 늘어놓고 일하는 편이라 거실 가운데 큰 책상을 두고 손 닿는 범위에 자주 쓰는 것들을 둬요. 수많은 책과 복합기, 스캐너 등 일에 필요한 기기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죠. 가끔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영상 장비도 갖췄고요.



현장 투어, 역사 강의, 시나리오 작성 및 개발 등을 하신다면서요. N잡러, 그러니까 갓생의 현실판이군요.

솔직하게 말하면 네, 맞아요. 바쁘게 살아요. 최근 몇 년간 가장 오래 쉰 게 코로나19 확진으로 3일간 앓아누웠던 거예요. 지역으로 말하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팔도를 다니고, 시대로 말하면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오가요. 그래서 제 별명이 안길동이에요.








어찌 그리 이 일을 좋아하나요? 전공도 역사라면서요.

제가 날 때부터 ‘동네에서 알아주는 역사 덕후 어린이’ 이런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역사, 지리 분야를 많이 좋아하셨어요. 아버지 서재에 역사책과 지리책이 빼곡했던 게 기억나요. 처음엔 호기심에 아무 책이나 뽑아서 내키는 대로 읽고 그랬던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왠지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게 역사는 교과서보다 아버지 서재에서 배운 게 훨씬 많은 셈이죠. 덕분에 시험 점수도 늘 잘 나왔어요. 아버지는 방송 프로그램도 시대물이나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셔서 저 역시 로맨스 드라마에는 관심 없고 사극을 보며 오열하는 좀 특이한 어린이였어요.








집이 지금의 본인 모습을 만들었네요. 특히나 아버지의 책이 단단히 한몫했고요.

어머니가 힘드셨을 거예요. 아버지가 허구한 날 책을 가져오니까. 어머니는 늘 ‘언젠가 이 잡동사니 책들 다 갖다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재미있는 건 어머니도 책을 좋아하셨어요. 어머니도 소설과 시집이 가지런히 꽂힌 작은 책장을 갖고 계셨거든요.(웃음) 근데 두 분은 저나 동생에게 “이 책 읽어봐라” 이런 흔한 추천 한번 하신 적이 없어요. 대신 도서 구입 전용 카드로 주기적으로 사고 싶은 책을 살 수 있게 해주셨죠. 전 그걸 ‘책 카드’라고 불렀는데, 11살 무렵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책을 샀어요?

처음엔 무슨 책을 사야 할지 몰랐어요. 서점은 넓고 책은 엄청 많으니까요. 그래서 말 그대로 그냥 골랐어요. 표지가 예뻐서 혹은 제목이 멋져서 산 책도 있죠. 표지가 예뻐서 산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였고, 제목이 멋져서 산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었어요. 그러다 점점 신중하게 책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사고 싶은 책은 점점 많아지는데 돈이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나름대로 리스트업도 하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다 판단도 하고. 그러면서 독서에 흥미를 붙인 것 같아요. 돌아보니 그 과정이 제 나름의 독서 취향을 만드는 시간이었어요.



보통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요?

투어, 강의 이런 일은 정해진 시간에 따라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집에서는 좀 자유롭게 시간을 쓰는 것 같아요. 눈뜨면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요. 정말 긴급할 때는 집에서 10시간이고 12시간이고 망부석처럼 앉아서 일하기도 해요. 그리고 일을 끝내면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 자다가 부활하는 거죠.








쉬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나요?

그래서 쉴 때 잘 쉬려고 해요. 돌아다니는 일을 하지만 사실 집순이거든요. 일 때문에 밖에 나가는 거지 본래 집을 좋아해요. 만약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면 저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탱고랑 나란히 누워 뒹굴 거예요.



탱고와는 언제부터 같이 살았어요?

7년 정도 되었어요. 탱고는 제가 집에 돌아오는 이유예요. 제 일이 지방 출장이 잦은데 가끔 너무 먼 지역에서 일이 있으면 그냥 자고 갈까,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거든요. 근데 탱고가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파김치가 되어도 꾸역꾸역 집에 들어와요. 제가 가장 행복할 때는 일 끝나고 들어와 다음 스케줄이 없을 때 침대에 누워 탱고를 쓰다듬을 때예요. 폭신폭신한 털의 감촉과 탱고가 기분 좋아서 내는 갸르릉 소리가 굉장한 행복감을 주죠. , 너무 좋다.








올해 들어 새로 시작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필라테스를 시작했어요.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집 1층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보이는 필라테스 센터에 등록했죠. 첫 수업 때 너무 힘들어서 깜짝 놀랐어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고 매일 걷는 일을 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운동 시간 내내 “아이고, 선생님!”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요.(웃음) 저는 3~4시간씩 걸으며 투어해도 당시에는 힘든 줄 몰라요. 대신 끝나면 파김치가 되죠. 근데 필라테스는 반대예요. 할 때는 죽을 것 같은데 끝나고 나면 개운하고 몸이 가벼워요. 이제 정말 내게 맞는 운동을 찾았구나 싶어서 열심히 다녀요.








훗날 집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이면 좋겠어요?

저에게 중요한 건 딱 두 가지, 고양이와 책이에요. 사실 이 친구가 산책냥이거든요. 바깥 공기를 좋아해요. 이사 오기 전에는 주택가라 종종 산책을 다녔는데 지금은 도로가 가까워 위험해서 산책을 못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도시는 차가 많기도 하고 이런저런 위험 요소가 많죠. 제가 집을 짓는다면 탱고가 산책도 하고 낮잠도 편히 잘 수 있도록 고양이 전용 테라스와 마당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계속 책을 살 테니까 서재가 큰 집이 아니라 집 전체가 서재인 그런 집을 상상해요. 생각만 해도 너무 좋네요.








워낙 명소를 많이 다니시니 이 질문을 안 드릴 수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봄에 기대하는 여행지 한 곳만 소개해주세요.

단 한 곳만 꼽으라면 아무래도 고궁이죠. 우리나라 명소를 늘 다니지만 아무래도 봄을 체감하는 장소로는 고궁만 한 곳이 없는 것 같아요. 남녀노소 누구나 아름다운 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까지 서울의 고궁은 전부 지하철로도 갈 수 있어서 접근성도 좋아요. 경복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규모라 큰 부담도 없고요. 익숙한 듯 낯선 풍경 속을 가만히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될 거예요. 미리 관련 도서나 영상을 보고 가거나 전문가의 해설 투어를 통해 더 깊고 풍부한 여행을 할 수도 있답니다. 꽃 피는 봄, 고즈넉한 궁궐에서 편안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를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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